헬렌 S. 정 - 니체 운명 수업 [인라잇먼트]
과학적으로도 인간의 삶은 DNA라는 유전자가 번식이라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복제해내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이지만 번식을 통한 복제라는 이 영원한 반복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영원히 돌고 도는 생의 수레바퀴 같은 것입니다. (16p)
알베르 카뮈는 삶의 덧없음을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시지프스의 인생임을 자각하는 일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누구나 2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답니다. 하나는 자살을 통해 부조리에서 도피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시지프스처럼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그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사는 방법입니다. 카뮈는 시지프스가 바위를 혼신의 힘을 다해 밀어 올리는 노력과 투쟁이야말로 신들에 대한 간접적 승리이며 그 자체로도 고귀하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그 본질은 전쟁터와 다름없는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무척이나 시지프스적인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노동보다 여가를 인간 본연의 자세이자 조건으로 내세우며 음악, 미술, 독서 그리고 말과 글을 통한 소통을 활용해 자신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갖고 그것의 성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시지프스적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그나마 소중한 한줄기 빛은 예술을 즐기는 것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6~19p)
따지고 보면 모든 생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무에 가까울 만큼 영원한 시간은 원형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이때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 자체도 무한히 되풀이 될 뿐입니다. 이런 영원회귀의 삶을 자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삶을 무한히 되풀이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의지가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운명애, 즉 아모르 파티의 자세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시점부터 우리 모두는 강력한 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p)
철학자 이윤은 저서 <굿바이 카뮈>에서 시지프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위 굴리기를 함께할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의미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시지프스가 혼자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고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속에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산다는 이타주의적 가치가 발현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 개인으로서는 무의미하던 시지프스지만 여러 명의 시지프스가 모이면 그 속에서 의미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의미는 네가 만들어주고 너의 의미는 내가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빛내주는 시지프스 네트워크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때 시지프스의 무의미한 삶은 유의미로 전환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22p)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인식, 즉 자신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 인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를 바탕으로 발생합니다. 권력의지는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인식한다는 것은 미지의 것을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분별해 판단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에 순종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내려는 권력의지의 표현으로 사람은 다 제각각의 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빨간 안경을 쓴 사람에겐 세상이 빨갛고 파란 안경을 쓴 사람에겐 세상이 파랗다는 비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개인마다 다른 인지라는 안경 때문에 우리는 매일 분노나 슬픔, 질투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44p)
우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행동한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할 뿐이며 실상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메커니즘, 즉 운명적으로 개개인의 DNA에 새겨진 감정체계가 생성해내는 생각에 의해 행동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을 하고 나서는 이를 나중에 합리화시켜 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4p)
뇌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 박사이자 의사인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은 우리의 머릿속에는 우리의 본질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각자가 나라고 부르는 자아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아나 그 비슷한 것을 감지한다면 그것은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에 대한 관념만 해도 몹시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다양한 실험과 실제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증명된 바 있습니다. 정식적 과정의 절대다수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자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두개골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게 뒤얽힌 과정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그래서 자아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아라는 개념은 아주 실용적이기 때문에 유용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 손, 내 아내, 내 자식들, 내 자전거가 나, 곧 자아에 속한다고 전제하면 삶이 더 간단해진다는 것이지요. (52p)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경험 중 극히 일부분만을 의식하고 살기 때문에 당연히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이 훨씬 크다고 합니다. 이런 무의식 영역에 들어 있는 것들은 언어나 논리나 가치관 같은 사회적 필터때문에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이 보기에 불교의 참선은 이 필터를 얇게 하거나 제거하는 작업으로서 무의식을 의식으로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로버트 온스타인도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침의 경험을 우리 두뇌의 좌반구와 우반구의 기능이 균형을 되찾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참선을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61p)
아리스토텔레스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여가를 생활의 중심으로 놓고 제대로 즐길 줄 알아야만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일생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일이란 인간이 여가를 가지기 위해 해야 하는 필요악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노예가 도맡아 해줄수록 좋은 것이었습니다. …… 오늘날 우리들이 여가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그동안 못 봤던 드라마 몰아보기나 실컷 게임하기 또는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 영화 관람하기가 아니면 지중해의 어느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즐기는 모히토 한 잔의 여유를 떠올리는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가는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예술을 즐기는 것이 이에 해당됩니다. (69p)
니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연과 합일되길 원하는 본능적인 힘이 존재하며, 그런 존재의 근원으로 향하는 충만한 기운을 느끼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음악을 권했습니다. 예술의 영역 중에서 음악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고들 하는 이유도 음악은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각보다 청각이 훨씬 감각을 수용하는 범위가 넓습니다. 니체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탐욕과 에고로 가득한 우리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음악을 우리들의 예외적인 상태를 보고 우리들의 숨겨진 진짜 모습을 보는 수단으로 삼기를 권유합니다. 니체에 의하면 우리는 관념과 상식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채로 살아가느라 정작 위대한 내면의 나를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수록 무의미한 삶은 영원히 반복될 뿐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동양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말 그대로 깨닫지 못하는 한 그 수준에서 그 자리만 맴맴 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음악을 통해 누구나 눈에 보이는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는 기적과 같은 시간들을 어렴풋이나마 엿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72~73p)
노예로서의 삶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탈출구를 제시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도 주목할만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세계적인 명작으로 손꼽히는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으로 활동하며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바로 노동, 작업 그리고 행위입니다. 근대화를 겪으며 노예가 없어지고 신분제도가 폐지되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인간의 삶 자체가 노동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연구의 결과물이었지요. 아렌트가 보기에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며 인간으로 활동하며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 사람이 그저 노동 수준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엔 악마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 노동이 작업이 되고 작업이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아모르 문디, 즉 세계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 개개인의 삶에 있어 세계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인간 속에서 살아가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 활동은 이 세계가 유지되도록 주변 사람들, 더 나아가서 세계를 위해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76~77p)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 말해주듯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돌고 도는 무의미한 반복이긴 하지만 그런 무의미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더 높은 경지로의 상승, 즉 육체적, 정신적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렌트의 통찰처럼 인간은 노동으로 시작해 작업 그리고 행위로의 이행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성숙시켜 나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럼으로써 무의미한 삶이 유의미해 질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진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지요. (77~78p)
다중우주에 사는 무수한 나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데 이 우주에 사는 나의 행동은 다른 우주에 사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른 우주에 사는 나의 행동은 이 우주에 사는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가 올바른 선택, 즉 선행을 할수록 좋은 일이 일어나는 다중우주의 부분을 더욱 키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87p)
우리 모두의 삶이 저마다 특별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닮은 것은 닮은 것끼리 만나기에 이번 생에서 목격하고 있는 비극적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전생에서 그 반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실제로 나 자신을 용서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결과를 낳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을 그저 원망하거나 슬퍼하지만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 현생의 누군가가 겪는 고통과 불행은 그의 영혼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과 고통이 담고 있는 영적 교훈을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현생의 고통이 카르마가 보내는 무자비한 형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원했던 영적 진보를 위한 또 다른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88p)
우리 모두가 고유의 카르마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삶 속에서 비극이나 고난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이런 부정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겪어냄으로써 우리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배울 것을 배우게 되고 성장해나가게 됩니다. 삶의 균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89p)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그레이엄 스위프트는 <강마을>에서 이야기와 인간에 관한 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정의하자면,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어딜 가든 혼돈의 흔적이나 빈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의 편안한 부표와 표지판을 남기고 싶어 한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야기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추락 중 찰나의 순간이나 익사하기 직전에조차 인간은 전 생애의 이야기가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다." (106p)
세계적인 뇌 과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도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비슷한 대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열정과 몰입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인데 인도에서는 이를 라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 우리가 흔히 괴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행복을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몰입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작은 자아를 잊고 자신이 삶이라는 큰 드라마의 일부임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니체가 단 하나의 가치 있는 덕이자 삶의 심오함과 숭고함을 깨닫게 만드는 요소로 창조를 꼽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에고에서 벗어나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이란 온 우주의 창조 에너지에 대한 집합적인 명칭일 뿐인데, 창조의 순간에 우리는 신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창조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의 흐름과 분리됩니다. 창조가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것이어야만 함은 분명합니다. 창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또한 삶 그 자체를 기쁨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18~119p)
그 당시 사람들은 창의성이라는 것은 인간한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창의성이란 미지의 어떤 곳에서 어떤 불가사의한 이유로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와서 도와주는 신성한 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인은 이것을 디먼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비롯된 사고방식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먼 거리에서 디먼이 자기에게 지혜의 말을 들려준다고 믿었습니다. ……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의 생각, 즉 마음속에는 항상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이미 타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 인간은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에 대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까지 끝없는 논쟁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소크라테스가 혼자 있을 때도 항상 디먼과 이야기했고,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을 제자와 이야기하거나 시장통에 나와 있는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나갔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뿐이라고 믿었습니다.
로마인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에서 분리된 창의적인 혼을 지니어스라고 불렀지요. …… 지니어스는 일종의 집요정 비슷한 것이어서 예술가가 일할 때 몰래 벽에서 나와 그들의 일을 도와주고 그 작품의 결과를 정해주는 존재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디먼처럼 인간이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주는 존재였으나, 이 또한 인간과 분리된 존재라기보다는 우리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창의성, 즉 놀라운 아이디어는 어디서든 발견될 수 있다는 것, 결코 자신이 천재이거나 운이 좋아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그저 소크라테스의 디먼처럼 내 안에서 속삭이는 존재이며 내가 원할 때 대화가 가능한 내 안의 또 다른 나입니다. …… 창의성이란 천재의 소유물도 아니고, 누구나 발견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경지라는 점입니다. 이는 창의적인 발견을 한 사람의 특출함은 결코 그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는 주장입니다. (120~126p)
실제로 니체는 병이 그 자신으로부터 그를 벗어나게 했다고 고백합니다. 츠바이크가 보기에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느끼고 작품화하고 고통을 앓아온 니체는 자기 내면의 신과 조우할 수 있었던 철학자였습니다. 니체가 원인 모를 신경계통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이를 그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진정한 자기이자 우주의 정신이기도 한 신을 만나 자아실현을 이루는 도구로 활용해 온 과정인 마치 고된 신병 끝에 신내림을 받아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어루만지는 만신으로 거듭난 한 위대한 무당의 삶을 떠오리게 합니다.
니체가 삶의 철학자로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그 자신의 삶에서 발현된 것이기에 고통과 질병으로 점철되었던 니체의 삶 자체가 바로 운명애요 삶에 대한 철저한 긍정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위대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공식은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운명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으로도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필연적인 것을 견디거나 감추지 않고, 그것을 사랑하고자 한다." (155p)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수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풀어놓을 줄을 모릅니다. 생각을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그 생각들은 머릿속을 걱정과 혼란, 소음으로 채우고 모든 부분에 나쁜 영향을 주며 삶을 궁지로 몰아갑니다. …… 결국 지나친 스트레스로 몸은 점점 더 피곤해지고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가 버릴 테지요. 생각의 노예까 되는 바람에 막상 일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이 인식의 붕괴를 일으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존재, 즉 내가 나라고 믿는 나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진화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장착하게 된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정체성이 도전을 받으면 정체성 시스템이 작동하여 걱정과 긴장, 기능 장애와 인식의 축소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이럴 때 정체성 시스템은 우리를 통제해서 우리 자신을 손상된 자아로 한정시킨다는 것입니다. 정체성 시스템이 활성화될수록 우리는 자연스럽고 즐거운 본래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몸의 감각에 집중해 촉감을 느끼는 것이 전부입니다. …… 이러한 의식은 정체성 시스템을 멈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 무한한 치유 능력을 발견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각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감각으로 돌아올 때 삶의 평화와 명료함에 닿게 된다는 것이지요. 내면의 지혜로 낡고 파괴적인 자기 대화를 멈출 때 삶은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이 과도한 생각들을 멈추게 하는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소리, 몸의 감각으로 인식을 옮겨 지금 여기 현재에 머무르는 연습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면 다리를 끌어당기는 중력을 느껴보고 샤워를 하고 있을 때는 피부에 닿는 따스한 물살과 샤워젤의 향기를 느끼며, 손톱을 손질하는 순간에는 그 고요한 평화를 즐기면 됩니다. 핵심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연습이 우리를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와 주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걱정이나 불필요한 생각들에 사로잡힐 때마다 감각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해 보라는 것이죠. 이 간단한 연습을 통해 우리는 더 건전하고 건강한 상태에서 평온함과 침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감각으로 돌아오기를 통해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 당신은 생각이 그저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조금 전에 한 생각에 제한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고요해지거나 편안해지려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그 자체에 고요해지려는 생각, 편안해지려는 생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단지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고칠 필요가 없으며 벗어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을 다루는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입니다. (180~186p)
매일의 삶에서 자신 앞에 닥친 과제들을 해결하며 성장해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 그 리듬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에 단지 찾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한 번의 깨달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끝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 내면 깊이 살릴 것을 살리고 죽을 것을 죽게 놔둘 줄 아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선불교에서도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아야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현실 생활 속에서는 비록 찌들고 지치고 남루하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본래 성품은 밝고 청정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엔 괴롭다, 고통스럽다는 말이 애초부터 해당되질 않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능력이 보자라고 몸이 부자유스럽고 가진 게 없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자성은 본래 무한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불법은 바로 그것을 발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발견함으로써 밝고 청정한 삶을 누리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아모르 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도 이렇게 참된 나를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죽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치 나인 양, 나의 분신인 양 붙들고 아끼던 고정된 생각, 고정된 관념이 죽어야 비로소 삶의 판도가 바뀌게 되고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선가에서는 그래서 "나를 세우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 참선이다. 일체를 주인공에 맡겨 놓고 지켜보면서 가면 그게 참선이다. 그냥 먹으면서 일하면서 차타고 출근하면서, 사랑하면서 잠자면서 그대로 참선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 놓고 뛰어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이거 잘못되면 어쩌나 구덩이에 빠지면 보통 낭패가 아닐 텐데 하면서 전전긍긍한다는 것입니다. 발자국을 성큼 떼어놓지 못합니다. 관습에 찌들어서 고정관념에 묶여서 영 옴치고 뛰질 못합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삶에서 닥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넘기면서 놓고 갈 수 있다면 참으로 싱그럽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그의 유명한 주사위 던지기 비유를 통해 "세계는 우연을 원리로 삼는 영원한 순환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그의 영원회귀 사상은 하나의 원 속을 뱅뱅 도는 단순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선처럼 끝없이 차원이 상승하는 반복일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삼라만상이 가진 기본구조인 프랙털이 그 좋은 예입니다. 부분이 전체를 반복한다는 프랙털 구조는 모든 생명체의 근간이 되는 DNA의 구조와도 일치하는 것으로 부분에 전체가 담기고 전체에는 부분이 담긴 무한 반복의 패턴인데 나선형으로 확장해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진화의 과정은 패턴이 반복되는 과정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이 바로 이러한 프랙털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패턴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 만델브로의 프랙털은 니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운명애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씁니다. 실제로 인생의 각 지점에서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들이 다 프랙털과 같은 반복이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200p~20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