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붉은 와인 3화 본문

팽이 이야기/아무말 끄적끄적

붉은 와인 3화

팽이a 2021. 8. 8. 22:20

약으로 묻었던 감기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다. 기침도 나고 머리도 조금 뜨끈하다. 그녀는 메이가 가져온 차를 마시다 잠시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기대보았다. 
“콜록 콜록 .... 레이안씨?!”
 기침 때문에 바로 눈을 떴는데 눈앞에 레이안이 앉아있었다. 놀라 당황하는 벨루아를 보고 레이안은 그저 웃으며 인사할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벨루아는 놀라 눈만 깜빡였다. 이 상황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누구한테라도 물어보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곳엔 레이안과 벨루아 단 둘 뿐이었다. 
‘내가 잠이... 들었었나?...’
“제가... 잠 들었었나요?”
“새근새근 잘 주무시던데요.”
 레이안은 그녀의 볼을 붉혔던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벨루아는 몰아치는 창피함에 귀가 빨개졌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벨루아의 목소리가 민망한만큼 작아졌다. 레이안은 대답 대신 웃으며 차를 따라주었다. 꼭 그가 이 집의 주인인 것 같다. 
“얼마 안됐어요. 피곤해 보이셔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크흠, 이 시간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녀는 헛기침과 함께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고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림을 가져왔어요.”
 그제야 벨루아의 머릿속에 휴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이렇게 갑자기..’
“보통은 미리 기별을 주고 오시는데 살짝 당황스럽네요.”
“제 그림을 보고 싶으시다는 말에 너무 기뻐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림은 어디 있나요?”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주위를 살펴보아도 가져왔다던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휴이님께 드렸습니다.”
“왜 아저씨에게..”
“전부 사셨거든요”
“네? 크흠, 휴이 아저씨가요?”
 자다 일어나서 목이 건조했는지 목소리가 방정맞게 나갔다. 그 모습에 레이안이 피식 웃자 벨루아의 얼굴마저 민망함에 발그레졌다. 
“아니요. 아버님께서요.”
 벨루아는 표정을 가다듬고 진위를 알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휴이를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저 끝에서 거북이 마냥 고개를 쭉 빼고 이쪽을 몰래 보고 있는 메이를 발견했다. 
 멀리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게 홀려있었다. 자세히 보니 메이의 시선이 레이안에 딱 꽂혀있다. 
“풉”
 메이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 벨루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뭐가 있나요?”
“아니요, 아니에요.”
 대답하는 와중에도 웃음이 새어나온다. 벨루아는 멀리있는 메이를 불렀다. 
“네, 아가씨!”
 메이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지 냅다 달려왔다. 달려오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레이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 휴이 아저씨 좀 불러와 줘.”
“네. 아가씨.”
“사이가 좋나봐요.” 
 메이가 안 보일때까지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자 레이안이 말했다. 우리 집에 당신 팬이 생긴 것 같아요라는 말이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네. 좋은 편이죠. 콜록 콜록”  
“차 드세요. 기침에 좋을 거에요.”
 기침에 머리가 울린다. 벨루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밤에 나가지 말았어야 해. 비를 그렇게 맞았으니 감기 안 걸리는 게 이상하지. 게다가 오늘도 찬물에 샤워를 그렇게 해댔으니.’
 뒤늦은 후회를 해봤자 이미 걸려버린 감기였다. 
“밤공기가 차죠?”
“네? 콜록 콜록”
 그 말에 괜히 가슴이 찔려 사레까지 걸릴뻔 했다. 
“오는 데 쌀쌀하더라구요. 찬바람 때문인가해서요.”
“아, 약 먹었으니 괜찮을거에요.”
 시계바늘이 9시를 넘겼다. 밤이 쌀쌀한 건 당연한 일. 당연한 말에 놀라지 말자. 
“혹시 밤에 분수대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네?”
 ‘분수대... 진짜 뭘 알고 하는 말인가. ’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 밤 산책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사람 그림자를 보았던 그 날. 급하게 몸을 숨겼던 그 날. 살인사건이 났던 그 날
 “쿡쿠쿡”
 갑자기 레이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차마 못 참겠다는 듯이 웃어대는 모습에 벨루아는 당황스러웠다.
“왜 웃으세요?”
“아, 하하, 죄송해요, 하하하 자꾸 네? 네? 그러시는 게 귀여우셔서요.”
“네? 아니, 큼, 흠. 실례되네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제가 유머 코드가 좀 독특해요.”
 진정하고 말하는 중에도 웃음끼가 잔뜩 묻어있다. 남 앞에서 저렇게 크게 웃는 건 분명 예의없는 행동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아니, 그걸 떠나서 지금은 그의 말투에 신경쓸 때가 아니다.  
“제가 밤에 산책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북적거리는 낮과 다른 매력이 있어서요.”
 진짜 이 사람인가? 그렇다면 진짜 범인?.. 아니지, 범인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말할 리가. 
“아... 그러세요?”
“밤에 돌아다닌다니, 좀 이상하죠?”
 그냥 하는 말일까, 아니면 떠보는 걸까?
“아니에요. 본인의 취미니까요.”
“특히 분수대에 가는 걸 좋아해요.”
 그녀는 어지러운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그 시간이면 분수대에 물도 없을텐데요.”
“물은 없죠. 그래도 간혹 재밌는 걸 보긴 해요.”
 그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그 장난끼 어린 웃음이 왠지 오싹했다. 어쩐지 그 때 보았던 그 미소와 겹쳐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어두운 밤에 재밌는 게 뭐가 있을까요.”
“궁금하세요?”
 벨루아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웃어보였다.
“궁금하네요.”
“그럼 밤에 한번 같이 나가보실래요? 생각보다 재밌을거에요.”
 레이안도 벨루아를 보며 씨익 웃었다. 감히 귀족에게 이런 말을 잘도 한다. 도발인가, 아님 장난인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벨루아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눈으로 미소지은 채 경고하듯 말했다. 
“언행을 조심하셔야 할 것 같네요.”
“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기분전환 할 때 도움이 되거든요.”
 레이안은 당황한 듯 보였으나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살인사건도 났는데 밤에 돌아다니는 건 자제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벨루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 그렇네요.”
 그러나 그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를 문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서자 언제 왔는지 메이가 쪼르르 그녀에게 달려왔다. 
“아가씨, 봤어요?”
“뭐를?”
“얼굴이요! 완전 잘생겼잖아요. 세상에 그런 얼굴 처음봐요. 사람 얼굴 맞아요?”
 메이는 그 얼굴에 완전히 빠진 듯했다. 
“아우~ 시끄러! 너무 푹 빠진 거 아니야?”
 벨루아는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났다.
“솔직히 빠질만 한 외모잖아요. 저런 분이 오시는 줄 알았으면 오늘 좀 신경써서 꾸밀걸.”
 하긴, 범상치 않은 외모이긴 하다. 쌍커풀 진 큰 눈에 오묘한 눈동자 색, 반듯한 자세와 걸음걸이. 여유로운 표정과 낮은 목소리. 외모뿐 아니라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 정황만 가지고 범인으로 몰 수는 없겠지만 영 꺼림직하다. 
“진짜 뱀파이어 같았어요. 아니, 뱀파이어보다 더 멋있었어요!”
“아 왜 또, 뱀파이어야. 뱀파이어 본 적은 있고?”
“봤죠. 그럼”
“진짜?”
“에드윈 백작님 연설 때 광장에서 봤어요.”
“아... 그 분..”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이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 틈에 숨어산다면, 에드윈은 그 반대였다. 어딜 가나 예외는 있는 법. 아마 제일 유명한 뱀파이어를 말해보라고 하면 어김없이 에드윈 백작이 나올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부유함으로도, 지식으로도 그와 빗댈만한 자는 많지 않은데다 뱀파이어이니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자상한 이미지는 수많은 팬들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그의 집 앞에는 모여든 팬들로 언제나 북적거릴 정도였다. 
 그런 그의 유일한 안티가 바로 벨루아였다. 
“왜 아가씨는 에드윈 백작님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그래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었는지 메이가 핀잔을 준다. 
“내가 뭘”
“누가봐도 띠꺼운 표정이잖아요. 백작님은 아가씨를 그렇게 챙기면서 선물도 보내주시는데 아가씨는 왜 싫어해요?”
“싫은 걸 어떡해.”
“아휴 참, 유별나셔. 설마 에드윈 백작님이 뱀파이어라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뱀파이어 얘기 그만. 나 그 단어만 들으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그래서, 휴이 아저씨는 어딨어?”
“아, 그게... 아무리 찾아도 안보여요.”
“없어?”
“네. 주방도 정원도 다 찾아봤는데 안 계세요.”
“이상하네.. 그럼 너라도 나 깨웠어야지.”
“네?”
“손님이 왔으면 아무리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웠어야지.”
“아가씨 주무시고 계셨어요?”
 메이의 말에 벨루아는 그걸 몰랐다고 말하는 거냐는 뜻을 담아 쳐다보았다.
“아니, 진짜요. 다같이 정원에 피크닉 나갔다가 잠시 들어왔더니 아가씨랑 그 분이랑 얘기 중이셨다구요.” 
“이 시간에 피크닉?”
“아가씨는 안 가보셔서 모르죠? 정원 얼마나 예쁘게 꾸며놨는데요. 밤에 전등불이 반짝반짝.”
“휴이 아저씨도 안 계시고 다들 나가 있었으면 문은 누가 열어준건데?”
“그러...게요?”
 진짜 뭐지?... 
“아! 마스터가 열어주셨나보죠. 근데 이 시간에 왜 오셨던 거래요?”
“그림 때문에.”
“화가셨구나. 어쩜, 더 멋있어.”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싶은 메이의 모습에 벨루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피크닉 그만 즐기고 들어오라고 해. 시간이 늦었어. 벌써... 어머, 벌써 10시가 넘었네.”
 벨루아는 메이를 뒤로 한 채 아빠 방으로 향했다. 휴이는 보이지 않으니 아빠한테 직접 물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아빠는 곤히 자는 중이었다. 
“진짜 이상하네. 그새 주무신다고?”
 벨루아는 아무래도 찜찜해 아빠가 보자마자 구매했다던 그 그림을 보러 갔다. 어디 있을지는 뻔했다. 그녀는 일명 그림방이라고 불리우는 방에 문을 열었다. 
“와...”
 누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레이안의 그림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화려한 색감이 벨루아의 눈을 사로잡았다. 고작 그림 3개가 더 걸렸을 뿐인데 방의 분위기마저 달라져있었다. 
“사람은 어딘지 거슬리는데, 작품은 좋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