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붉은 와인 4화 본문

팽이 이야기/아무말 끄적끄적

붉은 와인 4화

팽이a 2021. 8. 8. 22:21

“어제는 어디 가셨던 거에요?”
 비어있는 붉은 와인잔을 치우러 온 휴이에게 벨루아가 물었다.  
“문밖에 작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무슨 소란이요?”
“... 음모론자들이 잠시 다녀갔습니다.”
“아...”
 벨루아는 머뭇거리면서 얘기하는 휴이의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그 한 문장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휴이가 와인잔을 챙겨나가고 벨루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을 왜 믿을까. 벨루아를 따라다니는 기가 차는 소문들을 10의 한 명쯤은 진짜일까 의심하곤 했다. 그리고 그들의 10의 한 명은 진짜라고 확신했고 그들 중 10의 한 명은 꼭 가끔씩 찾아와 난리를 친다. 그들이 하는 게 마녀사냥이란 걸 인지하지 못한 채.
“하...”
 똑똑똑 
“창문 여셨네요?” 
 메이가 창문 옆 탁자에 가져온 와인과 큐브치즈를 내려놓았다.
“빗소리가 좋잖아.” 
“전 비 싫던데. 비 오면 어두침침하고 습기 차서 찝찝하고.”
“그런가?” 
“아가씨는 비가 진짜 좋으신가 봐요.” 
“응?” 
“창문 열린 거 오랜만에 봐서요. 항상 닫아놓으셨잖아요. 햇살 쨍쨍할 때는 창문에 손도 안 대시더니.” 
“그랬지.” 
 벨루아의 하얀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메이, 요즘은 뭐 새로운 거 없어?”
“없어요 요즘은. 아, 하나 있긴 하다.”
“뭔데?”
“송곳니 살인사건이요. 범인 잡혔대요”
“진짜? 누구래? 뱀파이어지?!”
“아니요. 그 남편이요.”
“남편? 남편이 자기 와이프를 죽인거야?”
“네.”
“왜?”
“의처증이라는데 지금 조사 중이래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게 사실은 아가씨가 그런 거래요.”
“나?! 남편이 범인이라며”
“왜, 어제도 왔던 음모론자들이요. 가끔씩 여기 와서 난리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래요 그 범인이.”
“근데?”
“그게 열받아서 아가씨가 복수한 거라고요.”
“복수를 할 거면 그 사람한테 하지 왜 와이프한테 해? 아니, 그리고 범인 잡혔다며.”
“아가씨가 꾸민거다 이런거죠. 자기 친구가 와이프를 죽였다는데 믿겠어요? 게다가 그 범인이 그 날 술에 잔뜩 취해 있어서 아무것도 기억을 못한대요.” 
“나 참, 어이가 없네.”
 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이 가져온 큐브치즈를 입에 쏙 넣었다. 
“그래도 악마숭배자보다는 낫지 않아요? 그건 진짜 밑도 끝도 없었는데 이건 그나마 좀 짜임새가 있달까?”
“이걸 짜임새있는 소문이라고 해야 하니?”
“실험 얘기는 재미있어 하셨잖아요.”
“그건 너무 허무맹랑하니까”
“마약중독자도 꽤 괜찮았는데.”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문이야.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나 울분이 터져.”
“근데 증거도, 근거도 없는데 어떻게 압수수색까지 당한거에요?”
“그 소문을 누가 믿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야. 메이, 내가 왜 사람들을 안 만나는지 이제 좀 이해가 돼?”
“아니요. 전혀요. 적극적으로 해명을 좀 해봐요.”
“뭘, 송곳니 사건은 제가 죽인 게 아니에요. 이렇게? 뜬금없이?”
“아, 그것도 좀 그런가.”
“먹이 던져주는 꼴이지.”
“그럼 제가 해명하게 그 비밀서약서만 없애주면 안 돼요? 그것 때문에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답답한 줄 아세요?”
“응 안돼.”
“이상한 데서 단호하셔.”
 메이의 볼멘소리에도 벨루아는 어린 막냇동생을 바라보듯 웃기만 한다. 
“이거 초대장이에요?”
 핑크빛 큐브치즈를 하나 더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메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초대장 스케치를 발견했다. 
“응.”
“초대장 그릴 재료는 있으세요?”
“아니, 없어. 사러 가야지.”
“빨리 가셔야겠어요.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래서 지금 가려고.”
“지금요?!”
 벨루아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두 개의 그림을 챙기며 황당해하는 메이를 향해 씨익 웃었다.
“기분도 꿀꿀하겠다. 마침 비도 오겠다. 딱이잖아?”

 문을 열자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와 흙을 머금은 비 냄새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까보다 빗줄기가 조금 더 세진 것 같지만 이 정도로는 벨루아의 외출을 막을 수 없었다. 
“비 오는 데 정말 나가시려고요?”
 벨루아의 요청으로 마차를 부르긴 했으나 걱정이 된 메이가 물었다.  
“마부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 나가면 안 되지.”
“날씨 좋을 때 놔두시고 왜 이런 날에...”
 메이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벨루아는 비 냄새를 한껏 들이마시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달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힌다. 들리는 소리는 시원한 빗소리뿐이었다.
“빗소리 좋다.”
 그녀는 좀처럼 열지 않던 마차의 커튼을 모처럼 걷어 보았다. 비 때문인지 길가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지나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발걸음을 재촉하며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길가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에는 세차게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첨벙이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지만 그마저도 곧이어 큰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에 금세 달려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와도 너무 오긴 한다.” 
 벨루아는 휴이를 향해 미안함과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비를 헤치며 달린 마차는 길모퉁이의 어느 화방 앞에 멈췄다. 휴이가 먼저 나가 우산을 펼쳐 벨루아를 씌워주었다. 
 끼이익. 
 벨루아는 낡은 문소리와 함께 쾌쾌한 냄새가 날 것 같은 화방에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벌써 빗물이 옷 여기저기에 튀어 그녀의 옷이 더러워졌다.
 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가 딸랑거리며 울리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들리셨네요.”
 화방 아저씨의 투박한 인사는 그녀가 깔끔하고 값비싼 재료들이 가득한 화방을 놔두고 먼지 냄새나는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였다. 
“오늘 비가 엄청 내리네요.”
“그래서 혹시 안 오실까 걱정했답니다.”
“저 기다리셨나 봐요.”
 벨루아의 기품 있는 목소리에서 나온 애교가 그의 귀에 닿자 빙긋이 웃는다. 
“그럼요. 아가씨 언제 오나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습니다.”
“정말요?”
“꼭 이렇게 우중충한 손님 없는 날에 와주시는 단골손님이시니까요.”
“그게 이유에요? 돈 때문에?”
“물론이죠. 아가씨.”
 화방 아저씨가 걸걸한 목소리로 장난친다.
“칫.” 
 벨루아는 살짝 토라진 척 화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휴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문 앞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다 벨루아가 자리를 뜨자 그녀의 바통을 이어받아 화방 아저씨와 수다를 이어갔다.
“요새 장사는 잘 되십니까?”
“파리만 날려. 요 바로 옆에 엄청 큰 화방 하나 생기지 않았는가. 다들 거기로 간다네.”
“그러니 정리를 좀 하십시오. 남들처럼 글씨도 이쁘게 써서 붙이시고요.”
“어허, 나만의 정리 방법이 있거늘.”
“밖에 칠도 좀 새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다 돈이야 돈.” 
 화방 주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벨루아는 이곳이 장사가 안되는 편이 더 좋았다. 화방에 귀족이 직접 찾아가는 일도 드물거니와 평소 외출을 잘 하지 않는 벨루아가 떴다 하면 힐끔거리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 때문에 금세 화방을 나와야했다. 
“안녕하세요.”
 아무도 없는 화방을 즐기며 구경하던 벨루아에게 누군가 다가갔다. 그러나 벨루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벨루아양.”
 이번에도 듣지 못하자 그가 벨루아의 어깨를 톡톡 살짝 쳤다. 그제야 벨루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레이안을 발견했다.
“레이안씨?”
 예상치 못한 인물을 그것도 이 날씨에, 이곳에서 만나니 벨루아는 반갑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이런데서 다 뵙네요.”
 반면 그는 그녀가 반가운 듯 인사했다. 
“아.. 그러게요. 자주 뵙네요.” 
“여기 자주 오시나봐요.” 
“그냥, 심심할 때요.”
“저는 여기 처음 왔는데, 벨루아양이 오신다니 앞으로 자주 와야겠어요.”
“아, 네.”
 벨루아는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예의상 웃어주면서도 속으로는 그가 얼른 다른 쪽으로 가길 바랐다. 그러나 레이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레이안이 스케치 두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분명 가방에 넣어온 초대장 스케치를 그가 들고 있자 벨루아는 깜짝 놀라며 얼른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이게 언제 떨어졌지...”
“혹시 둘 중에 고민 중이시라면, 전 이게 마음에 드네요.”
 레이안은 벨루아가 아쉬워 버리지 못했던 스케치를 골랐다. 그가 자신과 같은 그림을 골라주자 벨루아는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도 이게 마음에 들긴 하는데, 다들 다른 걸 고르더라고요. 그래서 아쉽지만, 이쪽 걸 그리기로 했어요.”
 벨루아는 다른 이들의 선택을 받은 반대편 스케치를 살짝 들어올렸다. 기쁜건 기쁜거고, 결정은 결정이니까. 그래도 누군가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은근한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레이안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벨루아양의 작품이니 벨루아양 마음에 드는 걸 하는 게 좋지 않나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벨루아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며 할 말을 찾았다.  
“아.... 선물할거라서요.”
“아, 그렇군요.”
 스스로가 듣기에도 변명 같은 말이었다. 레이안의 눈은 다시 선반으로 향했지만 벨루아의 눈은 그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자신이 그를 빤히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벨루아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애써 시선을 옮겼다. 
 한창 수다 중이던 휴이는 뒤늦게 벨루아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휴이의 시선이 한곳에 꽂히자 화방 아저씨도 그 둘을 쳐다보았다. 휴이는 매서운 시선으로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두 사람을 떼어놓을 기세였다. 
“왜, 신경 쓰이나?” 
“아닙니다.” 
“자네도 참, 과보호야.” 
 화방 아저씨는 그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의 말에 휴이는 그들에게 향하는 시선을 거두었지만, 흘깃흘깃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치 딸아이를 뺏길까봐 경계하는 아빠의 눈빛 같았다. 
우르르르르 쾅! 
 그때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을 향했다. 밖은 아까보다 훨씬 많은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 마차를 타고 출발했을 때만 해도 비가 이렇게까지 내리지는 않았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가 듣기 좋을 정도의 비만 내렸었는데 지금은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비가 많이 오네요.”
 집에 갈 걱정을 하며 밖을 보던 벨루아의 시선이 잘 보이지 않는 비 사이를 뚫고 마부에게 다다랐다. 
“허억!”
 벨루아가 낮게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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