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붉은 와인 5화- 비 오는 날의 화방 본문

팽이 이야기/아무말 끄적끄적

붉은 와인 5화- 비 오는 날의 화방

팽이a 2021. 9. 5. 22:08

마부가 마차에서 벨루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루아의 동그래진 눈과 마부의 지친 눈이 마주치자 마부는 벨루아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세상에!”
 벨루아는 표정을 구기며 급히 시계를 찾았다. 고개를 휙휙 돌려도 시계를 찾을 수 없자 벨루아는 여태껏 구경했던 모든 물건을 황급히 쓸어 담았다. 
“왜 그러세요?”
 놀란 레이안이 묻는 말에도 벨루아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벨루아는 한가득 담아 무거워진 바구니를 낑낑대며 다급하게 화방 주인에게 달려갔다.
“아저씨. 지금 몇 시예요? 아니, 일단 계산이요” 
 벨루아가 바리바리 들고 온 물건들을 쿵 소리나게 계산대 위에 올려놓자 화방 주인도, 휴이도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떨결에 벨루아와 같이 물건들을 담아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레이안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며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4시 정도 됐습니다만···.”
 안절부절 못하는 벨루아를 보며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계산기를 두드리는 화방 주인을 대신해 휴이가 말했다. 
“하.... 세상에, 벌써요?”
 그녀가 도착한 지 벌써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아래로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마부 아저씨요.”
 벨루아의 깨끗한 이마의 주름이 생겼다. 미간도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벨루아는 계산이 끝나자마자 레이안에게 인사할 정신도 없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휴이는 서둘러 우산을 펴 들었다. 
 붉은 손을 맞대 비비고 있던 늙은 마부는 벨루아를 보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사납고 투박한 미소 위로 거친 피부 위에 굳은 듯한 주름이 도드라졌다. 추위에 움츠린 어깨를 보니 그녀는 더욱 죄스러웠다. 
 벨루아의 속을 모르는 늙은 마부는 양손 가득 산 짐을 마차에 내려놓고 다시 내리는 그녀의 행동에 잔뜩 긴장했다. 2시간 동안 내리치는 빗속에서 겨우 마차 앞 작은 지붕 아래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런데 이 귀족 아가씨의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니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마부는 벨루아의 좋지 않은 표정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무슨 실수를 했나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 마차의 창문을 열어둔 것을 모르고 있어 빗물이 다 들어간 것은 아닌지. 이 추운 날에 식은땀이 나려 했다. 
 잘못하면 일당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 이 바보 같은.
 마부의 머릿속에 오만가진 생각과 자책이 1초도 안 되어 흘러갔다. 마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뭔지는 몰라도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저 아가씨. 제가..”
“차 한 잔 안 하실래요?”
“네?”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뭐라 대답해야 하나.
“제가 사겠습니다. 아.. 마침! 저기 찻집이 있네요.”
 벨루아는 휴이의 우산에서 나와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우산을 펴들고 어색하게 웃으며 앞장섰다. 그 바로 뒤를 어느새 가게를 나온 레이안이 따라갔다. 휴이는 레이안이 왜 아가씨를 따라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부를 챙겨야 했기에 레이안을 향한 말을 아꼈다.
 마부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답을 찾으려 고민하며 어물쩍거렸다.
“가시지요.” 
 휴이가 정중한 태도와 다정한 말로 그에게 정답을 알려주며 우산을 씌워주자 그제야 머쓱해하며 뒤를 따랐다. 따라가면서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게 맞는 건가 싶다. 

 비를 뚫고 찻집에 오는 사람은 이들밖에 없었나 보다. 찻집 안에는 주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 장사를 망쳤다고 생각해 한숨만 줄기차게 쉬며 반질반질한 컵을 더 반질반질하게 닦고 있던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어서오세요!” 
 이보다 더 큰 소리로 인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벨루아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가게 안에 들어와 보니 고급 찻집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진짜 귀족들이 찾을만한 곳은 아니다. 적당히 돈 있고 적당히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찾는 찻집처럼 보였다.
 벨루아는 창가 옆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녀의 맞은편에 레이안이 앉고 뒤를 이어 마부와 휴이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찻집 안에서 굳이 손을 들어 그들을 불렀다.
 마부는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테이블 앞에 멈춰서 어디에 앉아야 하나 필사의 고민을 한다. 그의 소리 없는 고민이 가게 전체에 울리는 듯하다. 
“아, 제 옆에..” 
“제 옆에 앉으시지요.”
 그가 왜 앉지 못하는지 눈치챈 벨루아의 말을 레이안이 가로챘다.  그러나 마차의 작은 지붕이 가려주지 못한 비에 홀딱 젖은 마부가 계속 망설이며 앉지 못하자 레이안이 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여기 수건 있으면 주실 수 있나요?” 
 벨루아가 예의 바르게 부탁하자 아주머니는 뛰다시피 수건을 찾아 건네주었다.
 찻집 안에 손님이라곤 그 4명이 전부였다. 그 4명에게서 풍기는 어색한 기류가 가게를 덮었다. 
  마부는 수건으로 연신 몸을 닦으며 행여 레이안에게 물기라도 묻을까 가능한 멀리 앉아 행동을 조심했다. 앉으라고 해서 앉긴 했지만 자신이 이 테이블에 있어도 되는건지 여전히 눈치가 보였다. 
“편히 앉으세요. 저도 비 때문에 바지가 다 젖었는걸요.”
 마부를 챙기는 레이안의 따뜻한 행동에 벨루아는 살짝 놀랐다. 살인사건의 범인이라 의심했던 것이 생각나 갑자기 미안해진다.
“어떤 걸 드실래요?” 
 레이안이 가죽으로 된 메뉴판을 펼치며 어색한 기류에 말을 얹었다. 
“아.. 그게..” 
 마부는 메뉴판을 보고는 있어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마부의 눈을 끈 것은 제대로 읽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는 차의 이름들이 아니라 그 옆 가격들이었다. 그는 어차피 뭔지 모르는 거 제일 싼 것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가격들을 읽어내려갔다. 
“캐모마일은 어떠세요? 제가 좋아하는 차에요.” 
 제일 싼 차를 찾으려 열심히 눈을 굴리고 있는 마부에게 벨루아가 친절하게 추천했다. 
“아, 네.” 
 누가 그 고혹적인 목소리를 거부하랴. 마부는 벨루아의 고운 미소에 수줍어하며 메뉴판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마부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은 참 어여쁘고 고상해 보였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지나 팔목까지 덮고 있는 연한 연두빛 드레스. 그 소매를 따라 이어진 어깨에 꽃모양 레이스를 지나 보이는 가늘고 여린 목, 새하얀 피부에 깊이 있는 큰 눈, 도톰하면서 붉은 입술, 그리 높지 않은 코, 어깨로 내려온 살짝 굽이친 머리카락까지 어쩜 저리 완벽할 수 있나 싶다.
 뱀파이어가 저리 아름다울까. 마부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고풍적인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멍하니 쳐다보게 되었다. 
“왜 그러세요?” 
 자신을 향한 마부의 시선을 느낀 벨루아가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 
 곧이어 따뜻한 차가 다과와 함께 나왔다. 한 모금의 차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차가웠던 몸이 녹아내렸다. 
‘아, 좋다.’ 
 사람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입맛에 맞으세요?” 
“네. 맛있습니다!” 
 마부도 차 한 모금에 잔뜩 긴장한 몸이 풀렸다. 심지어 아까까지 그렇게도 싫었던 세찬 빗소리가 듣기 좋아진다. 
“죄송해요. 제가 제 생각만 하느라 이 빗속에 계속 계시게 했네요.” 
 사과할 타이밍만 보고 있던 벨루아가 드디어 가지고 있던 미안함을 털어놓았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차까지 사주시고 ... 저야말로 여..영광입니다.” 
 처음 마시는 비싼 차가 부드러우니 참 맛있다. 이런 여유라니. 아침에 집을 나설 땐 상상하지 못하던 사치를 부리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기만 하다.
 벨루아는 마부의 진심 담긴 미소를 보자 안도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앞에 앉은 레이안의 존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은 왜 앉아있는 거지?...’ 
 멍하니 레이안을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레이안이 갑자기 빙긋이 웃었다. 생각지 못하게 쑥 들어온 그의 매력적인 미소에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얼른 찻잔을 들었다. 
“근데 아까 너무 많이 사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너무 많이 샀네요.”
“그 정도면 아까 제가 골랐던 그림도 그릴 수 있겠는데요?”
“아쉽지만, 그건 힘들거예요. 똑같은 걸 여러 장 그려야 하거든요.”
“똑같은 그림을요? 혹시 초대장이에요?”
“글쎄요.”
 왠지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대답을 피했다. 
“저도 그 그림의 완성작을 볼 기회가 있을까요?”
 레이안은 이미 눈치를 챈 것 같다. 
“운이 좋으면 보실 수도 있죠.”
“그럼 제가 골랐던 스케치는 버려지겠네요.”
 벨루아는 버려진다는 말에 새삼스레 마음이 아팠다.
“그렇겠죠?”
“버릴 바에 저에게 선물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걸요? 그냥 연필로 쓱쓱 그린 낙서 같은 건데요.”
“버리긴 너무 아까운 작품 같아서요. 전 그게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민망한 그림이었지만, 그래도 작품이라 불러주니 기분은 좋다. 
“드리기엔 너무 부족해서요. 죄송해요.”
“한 번만 생각해주세요. 저한테 큰 영광이 될 것 같아요.”
 작품, 영광. 아부 섞인 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설레는 단어들에 결국 망설이다 쭈뼛거리며 그림을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버리지만 마세요.”
“그럴리가요! 절대 안 버릴거에요.”
 벨루아의 그림을 받아든 레이안은 정말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벨루아는 자신이 진짜 화가가 된 기분이 들어 괜스레 흐믓했다.

'팽이 이야기 > 아무말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붉은 와인 - 6화 달빛연회  (0) 2021.09.05
붉은 와인 4화  (0) 2021.08.08
붉은 와인 3화  (0) 2021.08.08
붉은 와인을 마시는 여자 2화  (0) 2021.08.03
붉은 와인을 마시는 여자 1화  (0) 2021.07.3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