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붉은 와인 - 6화 달빛연회 본문

팽이 이야기/아무말 끄적끄적

붉은 와인 - 6화 달빛연회

팽이a 2021. 9. 5. 22:08

눈그늘이 그녀의 얼굴을 덮을 때까지 몇 날 밤을 새우며 정성을 다해 그린 초대장은 각자의 주인에게 보내졌다. 그리고 드디어 초대장의 그 날, 달빛연회 날이 다가왔다.
 달빛연회. 벨루아의 주최로 이루어지는 이 작은 다과회는 무명의 화가들에게는 로또와 같았다. 달빛연회의 멤버가 되었다는 것은 벨루아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이자 곧, 엄청난 기회였다. 
 자신을 부와 명예의 자리로 올려줄 황금 사다리! 그 날이 온 것이다. 
 벨루아는 어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다과 하나하나, 음식 하나하나, 청소 상태, 거실의 모습 등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이날만큼은 벨루아의 잔소리가 집안을 채웠기에 모두 잔소리를 피하느라 먼지 하나 보이지 않게 열심이었다. 
 달빛연회 날만큼은 메이도 벨루아의 불호령을 피해갈 수 없었다. 메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평소보다 꼼꼼하게 청소를 했다. 
 띵동.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일하던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이름에 걸맞게 한밤중에 열리는 달빛연회에 해가 미처 지지도 않은 이 시각에 방문한 몰지각한 사람이 누군지 메이도 고개를 빼꼼 들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러게요. 저번에 늦게 와 이번엔 일찍 나온다는 것이 너무 일찍 와버렸습니다. 또 한 번 실례를 범합니다.” 
 휴이가 열어준 문으로 레이안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들어왔다. 곁눈질로 레이안을 발견한 메이는 눈이 동그래져 테이블을 닦던 손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보시다시피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차를 내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조금 후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레이안이 못마땅했던 휴이는 단호하지만 정중하게 그를 가로막았다.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청소 중이라 마땅히 기다리실 장소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가 휴이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러시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못 들어오게 할까봐 노심초사하던 메이는 이때다 싶어 얼른 달려갔다. 
“저! 그럼 제가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할 일은 벌써 끝낸 거냐는 휴이의 눈짓에 메이는 양심이 찔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휴이가 사라지자마자 레이안한테 바싹 달라붙어 애교가 가득 섞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메이라고 해요.”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올라간 것 같다. 메이의 설레고 들뜬 마음이 목소리에 가득 담겨있었다. 
“안녕하세요. 메이양. 저는 레이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레이안의 정중하고 상냥한 말투에 메이의 마음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저.. 근데 그건..”
 레이안의 시선이 그녀가 청소하느라 들고 있었던 걸레에 닿은 것을 깨닫자 메이는 깜짝 놀라 걸레를 등 뒤로 급히 숨겼다. 
“아! 이건. 여기 그대로! 계세요 이거 놓고 올게요. 금방 올 거니까! 그대로 계세요~” 
 메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 달려갔다. 달려가면서도 혹시 어디 가버리진 않을까 계속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걸레를 두러 간 곳에서 청소 안 하고 어디 가냐는 잔소리를 들었지만 메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전력 질주로 다시 레이안에게 달려왔다. 
“아 하 헉. 아. 하. 하~ 저. 하 왔어요 흠.”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도 헉헉거리며 말을 못 할 정도로 숨차한다. 
“빨리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메이양”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이안은 싱긋 웃으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의 말에 메이의 심장이 또 한번 쿵 떨어졌다. 
‘어쩜 자상하기까지!’
 메이의 눈은 이미 하트로 변해있었다. 
“숨 좀 돌리고 가요 우리.” 
“우..우리요?” 
 메이의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메이는 신이 나서 집안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저긴 어디에요?” 
 레이안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그림들을 걸어놓는 방이었다. 
“저긴 미술관 같은 곳이에요. 아가씨랑 주인님이 사 오신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요. 가보실래요?” 
 앞장서서 걸어가는 발걸음이 꼭 주인 같다. 메이를 따라 들어간 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걸려있는 그림도 다양했다. 
“저희끼리는 그림방이라고 불러요. 그림에 대해 잘 몰라서 거의 안 들어오긴 하지만요.”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인가 봐요?” 
“네, 저희는 웬만하면 어느 곳이든 들어갈 수 있어요.” 
“꽤 자유롭네요.” 
“그런 편이죠. 그래서 제가 여기서 일하는 걸 좋아한다니까요. 헤헤.” 
 레이안은 자신의 그림 앞에 놓인 의자를 발견했다. 많은 그림들 중에 자신의 그림 앞에만 의자가 놓여있었다. 레이안은 눈썹을 위로 까딱하며 걸어가 그 의자에 앉았다. 
“같이 앉아요.” 
“네!”
 메이는 설레하며 그 옆에 조심히 앉았다. 레이안과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지자 메이의 심장은 쿵쾅이다 못해 드럼을 쳐댔다. 
“아예 못 들어가는 곳도 있어요?” 
“와인 저장실이요.” 
 메이는 긴장되어 목소리까지 살짝 떨렸다. 
“와인 저장실에는 왜 못 들어가요?” 
“말만 와인 저장실이지, 귀중한 물건들은 다 거기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요?”
“거긴 휴이님만 들어가시거든요. 안 그러면 왜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겠어요. 추측이지만, 분명 엄청 귀한 물건들로만 가득차 있을거예요. 에드윈 백작님이 보내주시는 와인도 거기 있대요. 그 와인 한병에 몇천만 원이라는 소문도 있는걸요.” 
 그 말에 레이안은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는 웃음을 안고 물었다. 
“와~ 진짜 귀한 와인인가봐요. 그 귀한 와인 먹어봤어요?” 
“아니요. 당연히 못 먹어봤죠.”
“궁금하지 않아요? 무슨 맛인지.”
“궁금해요. 근데 그 비싼 와인을 제가 먹어볼 기회가 있겠어요? 그냥 맛있겠다 하는거죠.”
“예상외로 엄청 맛없을지도 몰라요. 경악할 정도로.” 
“에이~ 설마요.”
“비싼 와인이라고 다 맛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레이안은 장난끼 많은 어린아이처럼 얄궂게 웃었다.
“레이안씨는 와인 좋아하세요?”
“그럼요. 없으면 못 살아요.”
 시간이 꽤 지나고 그들이 나오자 레이안이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달라진 거실이 그들을 반겼다.
 벨루아의 집은 특이하게 거실이 기역자 모양으로 되어있었다. 그 중 세로로 길게 나 있는 거실에는 와인빛 소파와 고풍스러운 테이블이 커다란 창을 보고 놓여있었다. 그러나 보통은 닫고 살아 거의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전 레이안의 당혹스러운 방문 때 그를 맞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가로로 길게 나 있는 거실은 평소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아 마치 넓은 복도를 연상케 했다. 레이안이 왔을 때 그는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열심히 청소 중이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데 방을 나온 레이안이 본 것은 달이 비추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분명 벽으로 가로막혀 있던 자리가 시원하게 뻥 뚫린 창으로 변해있었다. 창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천장까지 이어져있어 고개를 들면 어느새 까매진 하늘의 별과 달까지 보였다. 그 유리창 앞에는 고급스러운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레이안은 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거실을 보며 낮게 감탄을 내뱉었다.
“와...”
 더욱 커진 그의 또렷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는 레이안을 보며 메이는 뿌듯해했다. 
“놀라셨죠?” 
“네. 정말 근사하네요.” 
 레이안은 여전히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저도 처음 봤을 땐 엄청 놀랐어요. 벽이 창문으로 변하다니 무슨 마법 같잖아요.” 
“어떻게 한 거예요?” 
“벽을 뜯어낸 거예요.”
“뜯어내요?”
“원래는 저 창만 있었는데 아가씨가 햇빛을 싫어하셔서 밖에 벽을 만들었대요. 근데 보면 아시겠지만, 너무 아깝잖아요. 이렇게 예쁜데. 그래서 벽을 뜯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만든 거예요.” 
 그 말에 레이안은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진짜로 일일이 뜯었다 붙였다 해야 했다는데 지금은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밀기만 하면 돼요. 우리 집의 자랑이죠.” 
 메이는 정말로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누가 생각한 거예요?” 
 상상을 뛰어넘는 공간의 변신 때문일까, 그의 말투가 이상하게 서늘했다. 어이없어하는 것도 같고 황당해하는 것도 같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그의 달라진 말투에 메이는 눈치를 살폈다. 
“사라지는 벽이요? 그건 주인님이..” 
“아니, 저 창 말이야.” 
“아. 주인마님이요. 아침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집을 꿈꾸셨대요. 햇살 받고 자라면 따뜻한 사람이 된다고..” 
“정원과 창이라..” 
 계속 웃던 레이안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자 한없이 다정해 보이던 그의 인상이 꽤 차가워 보였다. 메이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어쩔 줄 몰랐다.
 한마디 쉼 없이 말하던 메이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자 레이안이 자신의 표정을 깨닫고 다시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 미안해요. 너무 멋있어서 감탄하느라.” 
 레이안이 표정을 풀자 메이도 안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조잘댄다. 
“멋있죠? 히히 다른 화가님들은 여기가 원래 창인 줄 아세요. 벽이 창으로 바뀐다는 건 저희랑 레이안씨 밖에 모를 거예요.” 
 이상하다. 벨루아가 이상한 소문들의 둘러싸인 이유 중 하나가 이 집 때문이었다. 날이 아무리 좋아도 창이며 문이며 꽁꽁 닫고 사는 것이 사람들 눈엔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는 화가들이 저렇게 큰 창을 항상 열어놓는다고  알고 있다면 왜 여전히 그 소문은 사라지지 않는 거지? 진작에 의혹이 풀렸어야 하지 않나. 
 잠시 생각하던 레이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문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거겠지. 달빛연회는 성공을 위한 사다리일 뿐이니까.’
 그의 조소 섞인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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