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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와인을 마시는 여자 2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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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와인을 마시는 여자 2화

팽이a 2021. 8. 3. 22:20

“에드윈 백작님께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다 떨어졌나?”

“네, 이제 한 병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내 곧 편지를 적어줌세.”

“네. 이번에도 저번과 같... 아가씨.”

사뭇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벨루아를 발견하자마자 황급히 말을 가렸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누세요?”

갑자기 나타난 벨루아를 보고 당황한 아빠의 눈이 흔들린다. 다행히 떨리던 동공이 테이블 위 신문을 발견했다. 신문에는 며칠 전 일어난 살인사건이 대문짝만하게 나와있었다.

“신문 말이다. 살인사건이 났다는구나.”

“살인사건이요?”

“네. 목덜미에 송곳니 자국이 있는 여자가 죽어있는 걸 청소부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눈치 빠른 휴이도 얼른 말을 맞춘다.

“송곳니 자국? 그럼 뱀파이어 짓이에요?!”

“아직 조사중이랍니다.”

“송곳니 자국이 있으면 뱀파이어죠! 내가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어요”

“하하,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 않니.”

“단정할 수 없기는요. 척하면 척이지.”

순간 벨루아의 머릿속에 며칠 전 밤 일이 떠올랐다. 그 섬뜩한 미소.

“언제... 그랬대요? 혹시.. 3일 전?”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다. 삼일 전, 밤산책을 나갔던 날. 벨루아는 등에 한기가 돌았다. 그 남자가 진짜 범인이면 어떡하지...

“아가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이거. 이거 물어보려고 온건데. 어떤 게 나아요?”

벨루아는 화제를 돌리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얼른 내밀었다. 벨루아가 들이민 것은 연필로 스케치 된 각기 다른 여러 장의 그림이었다.

“벌써 초대장 만들 준비를 하는거니?”

“벌써라뇨, 아빠. 얼마 안 남았어요.”

다행히 화제가 잘 넘어간 것 같다.

“약 3주 정도 남았습니다.”

벨루아의 아빠가 휴이를 바라보자 그가 벨루아를 대신해 대답했다.

“음... 나는 다 좋은데?”

아빠는 기대 어린 표정의 벨루아를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지 말구요. 이번엔 어떤 게 좋을까요?”

“음~”

재촉하는 딸의 목소리에 아빠는 다시 한 번 집중하며 한 손으로 턱을 짚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손을 받친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스케치들을 바라본다.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이 종이를 앞으로 가져오고 밀어내기를 반복하지만 이내 다시 턱으로 돌아갈 뿐이다.

“글쎄, 아직 칠을 안 해 잘 모르겠구나. 색이 들어가면 느낌이 또 달라지잖니.”

“그렇다고 이 모든 걸 다 칠할 순 없는걸요. 마음이 가는 거 하나만 딱 골라보세요. 휴이 아저씨도요.”

그녀가 휴이를 향해서 손짓하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펼친다.

“저는.... 이게 좋은 것 같습니다.”

“나도 이게 좋은 것 같구나.”

휴이가 고르자 벨루아의 아빠도 뒤이어 같은 그림을 골랐다. 달빛 아래의 큰 호수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진 스케치였다.

“따라 고르신 건 아니시죠?”

“허허, 소신대로 골랐을 뿐이지.”

진짜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휴이를 따라 선택한 건지 의심이 가는 웃음이었다.

사실 벨루아가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커다랗고 동그란 달이 마치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스케치를 골라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알겠어요. 두 분이 의견이 같으시네요.”

그녀는 펼쳐놓은 스케치들을 정리했다.

“명단은 정해졌니?”

“전시회장 한 번 더 다녀오고 확정하려고요. 아, 오늘은 날씨가 어떤가요?”

벨루아가 휴이에게 물었다.

“해는 떴지만, 구름이 많은 맑은 날씨입니다.”

“맑은 날씨?”

말의 어미가 맞지 않는다.

“구름이 많아 해가 강하지 않습니다.”

“음... 그럼 오늘 갈까요? 마차를 불러주세요. 준비하고 내려올게요.”

방으로 올라간 벨루아는 선택받지 못한 스케치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스케치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둔 채 나갈 채비를 한다.

그녀의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에 생기를 더해줄 코랄 색의 입술도 칠하고 레이스로 된 장갑과 창이 큰 모자도 챙긴다. 얼마 전 아빠가 새로 사다준 하늘색 긴 원피스의 옷 매무새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양산도 잊지 마렴.”

밖으로 나서는 벨루아를 배웅하며 아빠가 한마디 한다.

“그럼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는 끝이 레이스로 장식된 하얀색 양산을 손에 들었다.

문밖의 하늘은 참 꾸리꾸리하다. 구름 위에 해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두꺼운 구름이 해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래도 중간 중간에 구름이 없는 곳에서는 천사가 내려오는 후광처럼 빛이 쏟아졌다.

휴이가 마차의 문을 열자 벨루아가 올라탔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밝게 짓고 있던 그녀의 미소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내려간다.

“하... 가기 싫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 그녀는 답답하지도 않은지 커튼의 술 하나 건들지 않고 도착지까지 향했다.

그녀가 고풍스러운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한 무리의 여인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둘러싸 인사를 건넸다.

“어머,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러게, 너무 반가워요.”

우르르 몰려와 건네는 인사를 받으며 벨루아도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왔죠. 잘 지내셨나요?”

“저희야 잘 지냈죠. 한동안 벨루아양을 못 봐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어요.”

“벨루아양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여인들의 가식 섞인 칭찬에 그녀도 예의상 덧붙인다.

“부인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어머, 그래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네요. 호호호, 오늘도 멋진 작품이 많이 있어요.”

“그래요? 기대되네요. 그럼 저 먼저 실례할게요.”

벨루아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하며 여인들을 빠져 나왔다. 그녀가 멀어지자 방금까지 벨루아에게 웃으며 인사하던 여인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까 양산 들고 온 거 봤어요?”

“네네 봤어요.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웬 양산이람?”

“고상한 척 하는 거죠.”

“오죽하면 양산하고 챙이 큰 모자가 벨루아의 트레이드 마크일까요.”

“해가 쨍쨍하면 몰라, 해도 없는 날에 뭘 가리려고 저러나 몰라.”

“저 하얀 피부 지키려고 그러나보죠 뭐. 유난이야 정말”

“그게 아니고, 몸에 흉측한 흉터가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아무리 더워도 절대 반팔은 안 입잖아요.”

“흉터가 아니라 주사 자국이란 말도 있던데요.”

“어머머머머, 웬일이야 정말, 진짜요?”

“맞다 맞아, 나도 들은 것 같아요. 근데 진짜 있대요?”

“내가 아는 지인이 직접 봤대요. 예전 야유회에서”

“어머 세상에, 그럼 그 약 했다는 소문이 소문이 아니었나보네.”

벨루아와 같이 인사를 나눌 때와 똑같은 웃는 표정이었지만 나오는 말들은 전혀 딴판이었다.

‘저 말들이 안 들릴 거라고 믿는 걸까? 매번 참... 유치하기도 하지.’

벨루아는 자신을 향한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벽면에 걸린 그림들에 집중했다. 그림을 보는 벨루아의 눈이 사뭇 진지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하시나요?”

그칠 줄 모르던 여자들의 기분 나쁜 수다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금빛인 듯 은빛인 듯 오묘한 머리색과 붉은 듯 푸른 듯한 눈동자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남자였다. 오똑한 코에 하얗고 투명한 피부, 그 위에 얹은 근사한 미소는 여인들의 넋을 뺐기 충분했다.

“아, 그냥 여자들의 이야기지요.”

그나마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한 명이 최대한 예쁜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이런,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군요.”

“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뱀파이어처럼 아름다우시네요.”

누군가 홀린 듯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름다우세요.”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던 벨루아의 발걸음이 한 그림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

해질녘과 짙은 밤이 공존하는 하늘에서 내리는 별들이 한 여인의 손에서 꽃이 되고, 작은 사람이 되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배경은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그러나 벨루아는 그런 아름다운 배경보다는 그림 속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요?”

여인들의 대화 주제를 바꿔놓았던 그 아름다운 남자가 벨루아의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그의 얼굴을 본 벨루아도 아까 여인들처럼 순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 네.”

자신의 행동을 알아챈 그녀는 얼른 시선을 그림으로 돌렸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드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음, 색을 잘 쓰는 화가 같네요. 다른 화가들이 잘 쓰지 않는 색을 조화롭게 잘 이용하고 있는 점이 맘에 들어요. 그림 속 인물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섬세하게 표현해서 배경에 사로잡혔던 시선이 결국엔 인물에게 향하는 것도 좋고요.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제일 좋네요.”

평소 같으면 분위기가 좋다는 짧고 간단한 말로 끝냈을 감상평을 어쩐지 오늘은 솔직하게 다 표현해버렸다.

“제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시니 기쁘네요.”

“네?”

벨루아는 뜻밖의 말에 놀란 눈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빙긋이 웃어보이자 벨루아의 볼이 붉어진다.

‘뭐야.. 왜 이렇게 잘 생겼어.“

벨루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레..이안씨?”

벨루아는 그림 아래 화가의 이름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이름을 불러보았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벨루아 양.”

레이안이 웃을 때마다 벨루아의 볼은 더욱 붉어져갔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차 한 잔 같이 해주실래요?”

벨루아는 아직 보지 못한 그림을 뒤로 한 채 레이안을 따라 차와 다과가 있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여인들이 아까 멈췄던 험담을 이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가볍게 무시했다.

“저를 어떻게 아시나요?”

“화가들 중에 벨루아양을 모르는 자들이 있을까요?”

무명 화가들을 후원하고 있는 벨루아는 화가들 사이에서 유명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까지 아는 이는 드물다.

“보통은 이름만 알죠.”

“저 분들에게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레이안은 벨루아의 험담을 하고 있던 여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벨루아와 여인들의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아까처럼 가식적으로 웃어보였다.

’좋은 얘기는 못 들었겠네...‘

벨루아는 인사의 의미로 잠시 싱긋 웃어주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실 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아부섞인 말이란 걸 알면서도, 저런 얼굴을 하고있는 사람에게 들으니 참 민망하다.

“마치 뱀파이어 같으세요.”

레이안의 말에 방금까지 웃고있던 벨루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짜증을 참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이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대요.”

방금 전과 묘하게 달라진 벨루아의 말투에 레이안은 눈치를 살폈다.

“네. 들었습니다.”

“그 여인의 목덜미에 송곳니 자국이 있다더군요. 그 말은 즉, 범인이 뱀파이어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이런 시점에 부적절한 발언 같네요.”

“아,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뱀파이어같다는 말은 많이들 쓰는 관용어기도 하고 또 벨루아양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인 것 같아서요.”

뱀파이어가 나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벨루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습니다. 이제라도 주의해주세요.”

“그런데, 그 살인사건은 사람의 짓일수도 있지 않나요?”

눈치가 없는거야. 해보자는거야.

“송곳니 자국이 있는데도요?”

“저번에 비슷한 사건도 사람의 짓이었으니까요.”

“그때의 범인은 이미 잡힌 걸로 알아요. 이번 건 별개의 사건으로 봐야죠. 그리고 현재 단서는 그 송곳니 자국 하나인데, 의심을 한다면 뱀파이어 쪽이 먼저 아닐까요?”

“벨루아양은 뱀파이어를 싫어하시나요?”

그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닿았다.

“네. 싫어해요. 저는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천천히 즐기다 가세요.”

 

“뱀파이어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미친거지!”

벨루아는 목구멍에서 참고 참았던 말을 집에 돌아와 쏟아냈다.

“죽고 싶다는 거지 그게. 자살행위라고.”

“그것도 옛날 일이죠. 지금의 뱀파이어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아가씨.”

흥분한 벨루아와 반대되는 차분한 목소리로 휴이가 말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죠. 이번에 발견된 그 여자도 봐요. 송곳니 자국!”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니까요! 범인이 잡히지 않았는데 왜 다들 뱀파이어는 아닐거라고 하냐구요. 송곳니 자국이 나왔으면 뱀파이어부터 수색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주변에 누가 뱀파이어인지도 모르는 데.”

“그 전 사건도 사람이 한 짓이었습니다.”

“아, 왜 다들 그 얘기야?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죠. 아저씨! 아저씨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인간사냥 하던 시기잖아요. 그럼 무서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감이 불편해서 그렇지, 인간사냥이 인간을 죽이는 건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도 뱀파이어 만나겠다고 밤만 되면 밖에서 사냥 당하길 기다리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뱀파이어 만나는 법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는걸요.”

“그니까, 그게 이해가 되냐고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그렇게 흥분하셨어요.”

메이가 얼음이 동동 뜬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벨루아는 한껏 차가워진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도 속이 풀리는 것 같진 않다.

“전시회장에서 만난 사람 때문에. 나보고 뱀파이어 같대잖아.”

“칭찬이잖아요.”

그 말에 벨루아는 메이를 노려보았다.

“아.. 아니, 제 말은 보통 사람들에게는요. 근데 아가씨는 왜 그렇게 뱀파이어를 싫어하세요?”

“너는 뱀파이어가 왜 좋은데?”

“잘생겼고, 힘도 쎄고, 능력있고, 다 가졌잖아요.”

“걔네들이 뭘 먹고 사는 지 잊었어?”

“뱀파이어들이 사람 피 먹는 거야 당연한 거잖아요. 뱀파이어들도 먹고 살아야죠.”

“하....”

답답하다 못해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럼 만약에, 사람이 사람 피를 먹으면?”

“네?”

“아가씨.”

벨루아의 말에 휴이가 그녀를 불렀으나 벨루아는 손으로 그를 가로막고 말을 이었다.

“진짜로 만약에 예를 들면 사람 피를 먹어야만 하는 병이 있어서 피를 마셔야 한다면? 그럼 어떨 것 같은데?”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사람이면 지켜야하는 선이 있는 건데.”

“그 사람도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데도?”

“웩, 으, 어우 소름끼쳐. 진짜 그건 아니죠. 어떻게 사람이 사람 피를 먹어요. 아무리 병이어도? 생각만 해도 속이 다 안 좋아져요. 그런 상상하지 말아요. 너무 끔찍하고 무섭잖아요.”

메이는 진짜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메이양, 이제 그만 들어가서 일하세요.”

휴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 메이는 휴이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봤죠? 딱 저 느낌이 내가 뱀파이어를 생각할 때의 느낌이에요. 왜 다들 뱀파이어를 좋아하는지 난 이해가 안된다니까요.”

“왜 또 휴이를 괴롭히고 있니? 무슨 일 있어?”

“아빠!”

휴이가 찻잔에 그를 위한 차를 따랐다.

“별 거 아니에요. 아저씨가 내 편 안 들어줘서 삐진거죠 뭐.”

“하하, 아빠는 뭐든 니 편이야. 전시회장에서 맘에 드는 작품은 있었니?”

“아 맞다, 까먹을 뻔 했네요.”

그녀는 종이에 숫자를 적어 휴이에게 건넸다.

“그림을 더 보고 싶다고 몇 점만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

“이분의 그림을요?”

휴이가 의아한다는 듯 물었다.

“네. 왜요? 아저씨가 볼 때는 별로였어요?”

“아니요. 이 분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줄 알았는데요.”

“공과 사는 구별해야죠. 전 이제 들어가서 쉴게요. 크흠,큼,”

“감기 걸리셨습니까?”

벨루아가 잔기침을 하자 휴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에요. 목이 건조해서 그런가봐요.”

똑똑똑

그날 밤 휴이가 감기약을 가지고 올라왔다. 그러나 휴이가 가져온 것은 감기약만이 아니었다. 그가 들고 온 쟁반 위에는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이 함께 있었다. 벨루아가 붉은 와인을 발견하고는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 아침에 먹었는데요. 그거”

벨루아의 말투도 평소와 다르게 냉랭하다. 휴이는 가져온 쟁반을 굳게 닫힌 창가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 옆에 바른자세로 섰다.

“드신 척 하셨죠. 세면대에 버리셨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쯤은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요.”

“하루가 이틀이 되는 법입니다.”

벨루아의 날선 눈빛이 휴이를 향했다. 휴이도 지지않는다. 팽팽하게 부딪히던 신경전에서 먼저 굽힌 것은 벨루아였다.

“하... 알았어요. 두고 가세요.”

“안 나가세요?”

“드시는 거 보고 나가겠습니다.”

벨루아의 짜증이 가득 섞인 매서운 눈빛에도 휴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다시 신경전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벨루아는 와인잔에 담긴 붉은 와인을 한입에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붉은 와인이 혀에 닿자 특유의 비린내가 입안 가득 퍼졌다. 벨루아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그녀는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물로 입을 헹궜다. 세 번이나 헹궜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비린 맛에 벨루아는 옆에 놓인 감기약을 덥썩 들어 잘근잘근 씹었다. 충동적으로 넣은 것이지만 효과는 좋았다. 약의 쓴 맛이 다른 향을 말끔히 덮어주었다.

“물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됐어요. 이거나 가지고 가세요.”

벨루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휘휘 내저었다. 휴이는 가지고 온 쟁반을 들고 고개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리니 테이블에 단 과자가 남겨져 있었다.

“하.... 오늘 참 힘드네.”

그녀는 단 과자를 입에 넣으며 닫힌 창을 바라보았다. 나무판자로 딱딱하게 막혀있는 창문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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