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하루카 요코 -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메멘토] 본문

하리 이야기/하리의 작은 책방

하루카 요코 -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메멘토]

팽이a 2019. 10. 27. 19:25

* 이 소설을 보고 우에노 지즈코라는 인물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 그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 


  "이기고 싶습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다른 코너나 광고로 넘어가니까요." 
  "상대방을 때려눕히려고 하면 안 돼요." 
  "왜요? 왜 그러면 안 되나요?"
  "그러면 당신이 그 세계에서 미움을 받게 돼요. 그건 효과적인 방책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하루카 씨는 여기서 때려눕히는 방법이 아니라 상대방을 갖고 노는 방법을 배워서 돌아가세요." 
  "논의의 승패는 당사자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청중이 정하죠. 상대방을 갖고 놀면 승패는 저절로 정해져요. 그 이상으로 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남자를 갖고 놀면 말이죠, 얼굴이 시뻘게져서 화를 내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25~27p)







  '본능'이라는 말에 속박되면 안 된다. '본능'만큼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말은 없다. 본능이라는 말은 벗어날 수 없다는 암시를 걸기 때문이다. '모성 본능'이 가장 좋은 예다. 이것은 여성의 등에 벗어날 수 없다는 딱지를 딱 붙여 놓고 '여자의 숙명'이니 감수하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모성'이 정말로 본능이라면 자녀 살해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처럼 어머니도 자기 자식을 죽인다. - 고마샤쿠 기미 <마녀의 심판> (53p)







  '난 진짜 바보야.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어. 역시 못 따라가겠어.'
  그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이 발제문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가요?"
  이 차이를 낳는 것이 열등감이다. 이해할 수 없을 때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며 주눅이 들 것인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것인가? 이 차이는 크다. 이 차이가 있는 한, 의심은 늘 상대방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다. 이 상태로는 영원히 논쟁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학문은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곳에서 학문이란 연구자가 비판하는 것이었다. 앞선 사람들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 앞선 사람들의 과오를 지적하고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작업이 대학원 수업이었다. (61~62p)







  그리고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직장에서 건드리지 말라는 모든 분야에 대해 대학에서 배우고 있었다. 사람은 감추려고 하는 것일수록 보고 싶어 한다. 아니, 그 대상을 정확히 알아보면서 감춰야 하는 이유도 알고 싶어 한다. 정말로 건드리면 안 될 만큼 '위험'한가, 그렇지 않은가? 목이 떨어지는 문제인가, 잠깐 뜨겁기만 하고 그만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험'한 것은 감추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감추려 하는 '사상'이었다. 감추기 때문에 문제를 못 보게 된다. 못 보니까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오해가 생긴다. 오해는 쓸데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그 공포야말로 '위험' 사상이 된다. 그리고 한번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그와 관련된 것들'은 프로그램이 져야 하는 책임과 직결된다. … 하지만 이미 취사선택된 정보를 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왜?"라고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문제의식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역사는 무지가 비극을 반복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102~103p)







  토론을 하면, 즉 여성이 남성의 말을 반론하면 왜 그들이 그렇게 감정적이 되는지 나는 오랫동안 의문을 품었다.
  오다 모토코는 <페미니즘 비평>에서 남성 심리를 훌륭히 분석하며 남성이 왜 그렇게 우위에 서기를 고집하는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여성의 열등함이 왜 꼭 필요한지를 폭로했다. 그녀가 '여자가 조금만 반론해도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분노하는 남자는 드물지 않다'고 단언한 배경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거울에 비치는 남성의 모습은 작아지며 인생에 대한 적응력이 줄어든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남자들과 똑같이 노력하면 '여자답지 않기' 때문에 '열등'하고, 여자들과 얌전히 행동하면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열등'하다. 결국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든 '여자의 열등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다. - 오다 모토코 <페미니즘 비평>

  지(知)는 현실에 딜레마를 가져온다. 
  지는 내가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는 내게 사람들의 무지와 완고함,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통감하게 했다. (106~107p)







  
사회과학의 문제는 '난해'하면 안 된다. 어떤 글이 '난해'하다면, 이는 그저 문장이 좋지 않거나 글쓴이 자신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을 썼기 때문이다. '난해함'은 사회과학의 기술(記述)에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는다. - 우에노 지즈코 <'나'의 메타사회학> (113p)







  이 수업을 들으며 나는 '되받아치는 이론'을 발견했다. … 공격받으면 우선 이를 고스란히 되받아친 다음, 거기에서부터 이론을 구축해 간다. 그 좋은 예가 우에노 지즈코의 <전후 책임과 대중 기억>이라는 논문에 나온다.

  
어느 기업의 최고위직에 가까운 사람을 만났을 때, "… 여자는 역시 일에 소극적인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말대로다. 그래서 뭐가 나쁘다는 거냐?'하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강 푼돈이나 쥐어 주고 공헌한 만큼 보상은 하지 않는 기업에 자기 인생의 100퍼센트, 심지어 120퍼센트를 팔아넘기는 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 자기 사생활, 가정생활과 균형을 고려해서 애초부터 일에 소극적인 겁니다. 이를 '정상'이라고 합니다. 

  … '여자는 역시'로 시작되는 공격에 '그래도'나 '하지만'으로 대응하면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몰라도 아무런 혁신성이 없다. 되받아칠 용기와 설득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118~119p)








  여성 작가는 픽션 안에서라도 본심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없다. … 그녀들에게는 절대로 깨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 있다. 남자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금기를 깨면 작가 생명이 끝난다고 봐야 한다. - 오다 모토코 <페미니즘 비평>

  … 하지만 오다 모토코의 통찰은 한 줄기 빛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썼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도 일을 하자.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외치면서 혼자 일을 계속하자. 우리는 앎과 언설이 일치하지 않는 다양한 현실을 산다. 이런 사실도 우에노 지즈코가 이미 지적했다.

  
젠더가 사회적 구축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우에노 지즈코 <차이의 정치학>

  '앎'이 초래하는 자기모순은 끊임없이 '의문'을 낳는다. 이런 의문들에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나날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나와 학생들의 결혼관은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앎'이 초래하는 자기모순과 그럼에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의문'이라는 공통 체험이 있다. (127~128p)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일본 헌법하에서 사랑을 통해 자발적으로 혼인했을 현대 일본의 아내들이 '노동 가축'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평등 부부 가운데 아내는 육아, 돌봄을 포함한 가사 노동의 90퍼센트 이상을 맡으면서도 장시간의 '시간제' 노동을 해 가계에 보탬이 되고, 대개 '지나치게 일하는' 남편보다 자유 시간, 수면 시간이 짧다는 통계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 오사와 마리 <가사 노동은 착취인가에 답하여> (135p)







  "저는 남녀평등주의자라서 결혼 뒤에도 여자에게 생활비를 내라고 할 겁니다. 그래도 제가 좀 더 낼 겁니다. 저는 매너 있는 남자니까요." 
  "왜 생활비를 여자보다 더 내겠다는 건가요?"
  "불평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직까지는 남녀 간 임금 격차가 있으니 그만큼 남자가 더 부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생활비 부담 비율을 7대 3으로 한다고 하죠. 그런데 이건 노동의 시장가격에 따른 비율입니다. 지불되지 않는 노동, 즉 가사 부담 비율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제가 생활비를 더 내는 만큼 제 몫의 가사 부담도 줄었으면 합니다." 
  "그럼 노동은 가격인가요? 노동의 강도는 어떨까요?"
  "대학교수는 일터에 매여 있는 시간에 비해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매여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지만 가격이 낮지요. 부부를 여기에 비유한다면 어느 쪽의 노동이 상위인가요?"
  … 노동의 강도와 노동의 가격 사이에 상관관계는 없다. 그렇다면 노동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 그럼 지불하지 않아도 될 돈을 지불하거나 감사의 말을 들어야 할 상대방에게 사죄하게 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시장화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 없이 노동을 말할 수 없다. … 데이트든 공동생활이든 돈이 개입하는 이상 '뭔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 종종 관계를 서먹하게 만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서먹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경제라는 커다란 지도를 알고, 자기가 있는 장소를 알고, 그 지도는 과연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가정 내 임금 격차가 남녀 간 권력 차이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성 산업이 번창하는 가운데 여자에게는 값이 매겨지고 남자는 이를 소비하면서도 성에 순수함을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성에 대한 이중 기준이다. … 성 노동에 아주 높은 값이 매겨지고, 다른 노동에는 부당할만큼 임금격차가 있고, 하물며 그런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자신의 가격을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섹스의 가격을 의식하는 여자에게 화를 내고 비난하기 전에 섹스에 가격이 있는 배경을 비난해야 한다. 
(140~145p)







  젠더 균형에 일정한 규칙은 없다. 젠더는 외면과 내면의 모든 부분에 개별적을 표출된다. 외면적으로는 머리 모양, 속옷, 겉옷, 구두, 손톱, 화장, 냄새 등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분류할 수 있다. 이것들을 어떻게든 조합할 수도 있고, 조합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내면적으로는 기호, 사고, 배려, 발상, 관점 등이 있으며 움직임으로는 행동, 표정, 말투, 발성을 들 수 있다. 
  어떤 부분이 어떤 젠더 균형으로 구축된 생물인가를 확인하기 시작하면 모순투성이 조합에 놀라게 된다. 젠더 균형은 드러나는 부분뿐만 아니라 시간 비율, 강도, 그리고 임의의 유무, 즉 자신이 뭔가를 선택적으로 하는가의 여부 등 다원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임의의 경우, 계산, 기호, 전술 등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다. … 그리고 이런 것들을 살필 때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라는 기존 분류항이 나침반이 된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나는 이런 항목들을 살피면서 젠더의 '중간'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분이 각각 독립적으로 젠더화되어 있고, 그 총체로서 인간이 성립된다. 그 성립 방식이 무작위적이고, 기준도 법칙도 없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젠더 균형이 나쁘다고 말한다면 조합도, 강도도, 임의의 정도도 제각각이다. 그와 동시에 젠더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젠더로부터 해방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젠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형성된 젠더를 갖고 살아간다. 이를 지각한다는 건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던 젠더에 급제동을 거는 작업이다. 강제된 젠더가 아닌 선택된 젠더로 변환하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작업은 발견의 놀라움과 겸허함을 가르쳐 준다. 이는 젠더로 이루어진 자신을 겸허하게 바라보고 거기에서 무엇을 취사선택할 것인가를 자신에게 묻게 한다. '의심한다'는 발상이 사회과학의 명제라면, 우선 자신의 젠더를 의심해서 스스로를 과학적으로 생각해 가고 싶다. (160~163p)

* 이 부분은 아직 '젠더'를 내가 규명짓지 못했으므로 잘 이해가 가지 않음. 젠더 관련 책들을 읽어보고 추후에 다시 생각해봐야겠음.







  "하루카 씨, 독창성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어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고, 그것들과 차별화하면서 자기만의 것이 탄생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다움을 얻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읽는 거죠." (175p)







  "지성과 교양이라는 말이 있죠. 사람들은 가끔 이것들을 묶어서 말해요. 하지만 지성이 있어도 교양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교양이 있어도 지성이 없는 사람도 있고요." … "지성과 교양을 다 갖추고 있으면 가장 좋죠. 공부하세요." 
  "돈은 있냐?"
  "없어도 돼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지. 굳이 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급할 때는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갖고 가라."
  학문도 그렇다. 굳이 쓰지 않아도 갖고 있는 편이 더 낫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거다. (177p)







  공부를 하다 보면 왜 하는지 목적의식을 상실하기 쉽다. 그럼 갑자기 미궁에 빠진다. 책을 읽는 것이 다가 아니라 늘 자신에 대해 되물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쉽게 좌절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부는 원래 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그러니 공부할 수 없는 이유는 언제든 찾을 수 있다.
  우에노 지즈코는 사회과학의 지(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훈련을 통해 '정보'의 양을 늘릴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회의와 자기비판을 통해 자명성의 영역을 소멸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질성의 영역에 대해 자신의 수용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 우에노 지즈코 <'나'의 메타사회학> (179p)







  가끔이지만 몸이 이상 반응을 보인다. 쿵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횡격막 근처가 뜨거워지고 세포가 요동친다. 이런 체험이 '감동'이라는 증상임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 그런데 공부에서 '감동'을 확인한 순간, 거기에 '감동하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감동'을 기획하고, 구성하고, 연출하고, 제공한 우에노 지즈코에게 '감동'했다. (213p)

* 내가 내 스스로도 왜 기분나쁜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간 적이 있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 왜 기분나쁜지 깨달암을 느낀 적이 있다. 이런 '감동'이 글쓴이가 느꼈던 '감동'이 아니었을까.







  수업을 하는 강의실과 일반 사회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조건이 있었다. 수업에서는 토론이 제대로 된다. 일반 사회와 달리 수업에서는 반론을 기다려 준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다. 다들 차분히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준다. 수업에서는 의견은 교환하는 거라는 상식이 통한다. 논자들은 이 상식을 믿고 말을 '고르는' 호사스러운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연예게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돈이 걸려 있다. 다들 사람을 다치게 해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살아간다. … 하물며 여자에게는 '남자의 체면'을 생각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압력도 따라붙는다. 이런 환경에서 과연 누가 차분히 기다려 줄까? 반론의 기회를 주지 않고 비겁하다는 말을 듣든 말든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어떻게든 다음 일을 따내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고 애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같은 게 이런 경쟁하에서는 미덕이 되지 못한다. … 끊임없이 미소를 띠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이야기하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런 게 통할 리 없다'고 생각한다. … 토론이 격해질수록 '여자다움'만큼 거추장스러운 게 없다. … 일반 사회에서 토론이 발언권 쟁탈전인 이상 말을 '고를' 여유는 거의 없다. 반사신경에 의지해야만 한다. 그럼 필연적으로 말실수를 하게 된다. 그 말실수를 어떻게 '얼버무리느냐'가 중요하다.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어떻게 '잘 마무리하느냐'가 중요한 거다. 말실수를 두려워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갖가지 '기술'을 익혀야 한다.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가운데 말하는 기술.
  남자의 간섭을 피하는 기술.
  말실수를 처리하는 기술.
  이런 것들을 완벽히 터득한 뒤에야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의견을 말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기지 않으면 의견을 말할 수 없다. … 만약 어느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환경에서 발언해야 한다면 어떨까? 자연스럽게 목소리부터 달라질 것이다. 목소리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호소하려고 시선을 움직인다.
  조금이라도 더 이해시키려고 말의 속도를 조절한다.
  조금이라도 더 납득시키려고 쉽게 표현한다.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으려고 화장하고 옷을 차려입는다.
  들어만 준다면 뭐든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할 게 아니라 모든 조건을 상대방 위주로 맞추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런 현실이 있다. 
(250~253p)







  첫 번째 방법 : 되받아치자

  그러고도 여자냐, 그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냐, 결국 자신만 소중한 게 아니냐 등등 젠더를 공격하는 말이 너무 많아 일일이 셀 수도 없다. 그런 말을 듣고 흔들리면 진다. '그래도'나 '하지만'으로 말을 꺼내면 변명처럼 들리기만 하니 꼭 피한다.
  그럴 때는 '자신이 소중한 게 왜 나쁘냐'는 식으로 곧장 되받아치자. 

  두 번째 방법 : '모르겠다'면서 질문하자

  공격받았을 때 반론하거나 변명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아무런 자각 없이 안이하게 쓰는 말이나 표현에 대해 질문하자. 이를 반복하다 보면 질문이 상대방에 대한 추궁으로 바뀐다. 끝까지 '모르겠다'고 하기만 해도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르겠다'는 말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그 효과가 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이 자명하다고 생각하고 쓰는 말일수록 '모르겠다'는 질문의 효과가 크다. 상대방을 갖고 놀기에 뛰어난 수단이다.

  세 번째 방법 : 'ㅇㅇ란 무엇인가'라고 

  두 번째 방법과 이어지는 방법이다. … 즉 모든 이념 장치를 따져 묻는 방법이다. 이런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답할 수 있다고 해도 이 단어들이 장치로서 기능하는 한, 그 대답 안에서 다시금 'ㅇㅇ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단어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나?'
  '가족이란 무엇인가?'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
  '큰 사랑으로 가족을 보살피는 사람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핵심을 짚는 동시에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질문의 기능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된다. 이유 없는 강제력이 있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지적하기보다 상대방이 그것에 대해 말하게 해서 공격력을 강화한다. 

  네 번째 방법 : 질문을 다시 질문하자

  먼저 질문을 다시 질문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당신에게 중요한 걸 말하라.'
  '당신에게 중요한 건 뭔가?'
  '당신은 몇 명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럴 수 있는가?'
  일단 상대방이 말하게 하는 거다. 그런 다음 상대방이 자멸하거나 모순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린다. 비겁한 방법이기는 해도 비교적 간단한 공격법이다. … 
  "왜 선생님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세요?"
  "실제로는 질문한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돌발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게 된다. 질문을 다시 질문하는 것만으로 완벽히 이길 때도 있다.

  다섯 번째 방법 : 폭넓은 지식을 갖추자

  이것은 우에노 교수가 수업을 하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이야기한 사항이기도 하다. 전문 분야만 아는 바보는 되지 말라는 뜻이다. 우에노 교수는 해마다 자세히 읽기보다는 많이 읽으라고 말한다. 많이 읽으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지식이 늘어난다. 그러면 상대방이 단편적인 이론을 들고 나왔을 때 곧바로 대응할 수 있다. … 신념은 근거나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렇게 안이한 주장을 맞닥뜨렸을 때는 "그건 당신의 신념이다." 하고 말하면서 귀를 기울이지도 말아야 한다. 계속 말하게 두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라. … 폭넓은 지식을 쌓으면 어떤 사람의 말이 그저 '신념'일 뿐인지 '논리'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방법 : 틀을 깨는 발상을 하자

  지식은 그야말로 틀을 깨는 발상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의심하면 처음으로 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의심하지 않고, 즉 가시화하지 않고서 무언가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 틀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 초조해질 것이다. 토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기보다는 상대해 주지 않는 기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눈앞의 틀을 의심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이론을 구축하는 사람과 틀을 의심하고, 틀에 이의를 제기하고, 틀을 부수면서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사람이 서는 자리는 저절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상대가 안 된다, 싸움이 안 된다고 청중에게 인식시키면서 이기는 방법도 있다.

  일곱 번째 방법 : 말에 민감해지자
 
  말에 민감해지지 않으면 토론에서 이길 수 없다. … 추상적인 싸움은 대개 애매하고, 승패를 가리기 어렵고,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게 될 때가 많다. 초점을 좁혀야 한다. 그러려면 어느 부분을 공격할지에 대해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전쟁에서 목표 지점을 설정하지 않는 막연한 공격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좋다. 부주의하게 튀어나오는 말, 자각 없이 쓰는 표현, 애매한 말 등이 모두 공격 대상이다. 싸움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싸우기 위한 태세를 갖춰야 한다. 우선 웃지 말자. … 미소를 띠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집중을 방해한다. … 그저 지금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 그러면서 허점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한 단어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우에노 지즈코는 연구자를 비판할 때 그 연구자의 책 전체보다 그 책 몇 쪽의 몇째 줄에 나오는 특정한 말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그 말의 개념, 그 말을 쓴 근거, 유사한 말과 다른 점 등 단어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계속 공격할 수 있다. 그렇게 사소한 데 신경 써야 하느냐고 생각할 게 아니라 아주 작은 허점부터 파고들어야 한다. 

  여덟 번째 방법 : 틈을 주지 말자
 
  앞에 제시한 방법들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미 상대방과 노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을 휘두를 수도 있게 된다. 미처 생각할 틈이 없을 만큼 공격할 때는 철저히 하자. 그러려면 머리 회전이 빨라야 한다. 잇따른 공격을 퍼부어 상대방을 교란한다. 우선 느닷없이 상대방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상대방이 비틀거리는 순간 틈을 주지 않고 다음 질문을 한다. 방어 태세를 갖추기 전에 다시 질문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답이 나오면 주저 없이 또 질문한다.
  '신화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신화는 옛날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이들을 영어에서는 어떻게 구분하나?'
  '어, 영어에서는….'
  '그렇다면 이야기와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음….'
  이렇게 계속 질문을 퍼부은 다음 틀을 깰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그런 분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때 나는 자신이 질문해 놓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탄했다. 이렇게 질문하려면 많은 지식을 갖추고 훈련도 해야 하지만, 딱 하나만 질문해도 괜찮다. 질문할 때는 절대 틈을 주지 말자. 질문은 불시에 해야 공격의 위력이 커진다. 이것은 승부다. … 여기에 이론이 핵심을 뒷받침한다면 난폭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도 공격력이 커지면서 청중에게 비판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아홉 번째 방법 :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하자

  … 상대방의 동향을 냉정하게 간파하고 청중의 동의를 얻으려고 할 때 흥분은 방해가 될 뿐, 좋은 평가를 얻게 해 주지 않는다. … 아무리 의미 있는 발언을 해도 내용 대신 발표자의 성격이 먼저 전달되면 곤란하다. 

  열 번째 방법 : 공부하자

  … 이론 없이 질문을 퍼부으면 이해력이 모자란다고 할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으면 상식이 없다고, 말에만 집중하면 여자답지 못하다고, 틀을 깨는 발상을 하면 말이 안 통하는 여자라고 할 것이다. 모든 고정관념과 싸워서 이기고 설득력을 갖추려면 이론이 필요하다. 이론을 갖추려면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258~270p)







  모든 걸 다 페미니즘에 기댈 게 아니라 자신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기는 각자 자기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을 말로 표현해서 이해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해소하겠다는 건가?

  자기는 자기에 대한 언설을 통해 구성되어 간다. - 노구치 유지 <내러티브테라피의 세계>

  자기를 가시화하지 않으면 페미니즘을 이용할 수 없다. 사람은 말하기를 포기해도 말로 사고한다. 감정도 말로 지각한다. 사람이 언어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구축된 존재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276p)







  행복이 어떤 것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무언가를 어떻게 보는가, 볼 힘이 있는가에 따라 '행복'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은 눈앞의 현실을 볼 힘이 있는 만큼 보지 않을 힘도 있다. 보려고 노력할 수도 있지만 보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 사람이 어떤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지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어떤 사고를 깨닫게 하고, 이를 변화시키고, 사고를 구축하는 '작업' 자체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보는 방식도, 듣는 방식도 변하지 않는다. (284p)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람은 뭔가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보여 주지 않을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꿰뚫어 볼 수도 있습니다. 말이 갖는 힘과 인간의 연약함을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알고 난 뒤에는 말의 힘과 중요성을 간과하고 잘도 살아왔다 싶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 억압하는 말이 왜 그렇게 기능하는가를 알고 나니 그 말이 적어도 저에게는 억압 효과를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방, 중상하는 말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고 나니 그 말이 적어도 저에게는 무기로서 위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강해진다는 것은 말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 그러기 위해 사회학을 공부했다는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291~292p)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