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김승희 -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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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팽이a 2019. 10. 27. 19:30

1. 홀연 (忽然)

홀연…… 아름다운 말이다

홀리는 말이다

상상력을 주는 ㄴ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말이다

그 말에 기대어 아침을 본다

그 말에 기대어 기도한다

철로에 누워 하늘을 보는 마음

서로 사랑한다면 두려울 것 없으리, 그런 마음

홀연…… 누구나 그 꿈을 갖는다

홀연 누구나 그 사랑을 갖는다

홀연 누구나 어깨를 기대고 싶은 말이다

누구나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슬픈 내일 같은 말이다

2. '하물며'라는 말

하물며라는 말이여, 참으로 아름답도다,

그 말에는

슬픔 가득한 서광의 눈동자가 들어 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다시 한번 돌아다보는 사랑이 들어 있다,

비천한 것들에 대한 굉장한 비탄이 들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물며가 없다,

마음이 마음이 아닐 때 들려오는 말이여,

하물며라는 증오를 거부하는 말이여,

아무것도 아닌 네가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한 번 더 은은히 돌아보는 눈길 같은 말이여

한없는 바닥에서 굉장히 쟁쟁한 말이여

3. '부디'라는 말

바람은 불며

부디라는 말을 남기고

꽃송이는 떨어지며

부디라는 말을 퍼뜨리고

논밭은 하늘을 보며

부디라는 말을 올리고

폐허 가운데 지어진 병원은 하늘을 보며

부디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은 어찌 보면 그런 말들로 이루어져 있고

수평선 지평선

그런 말들의 숨결

그런 말들의 안부

그런 말들의 당부로 얼룩져

나무들은 자라나며

나비는 날아가며

파도들은 춤추며

해와 달과 별들은 노래하며

장미 꽃잎 위에 장미꽃보다 더 커지는 이슬의 몸을 붙잡고

흔들리는 여자의 몸은 삐걱이며 덜그럭거리며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며

햇빛도 물도 바람도 숲도 바다도

부디 부디 부디…….

우리의 말은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어

달에 가서 쌓이고……

4. '아~'라는 말

아~라는 말 속에는 모든 것이 잉태된다

아~는 우리말의 알파와 오메가요

시종, 전부, 총체다

아에서 채가 생기고 채에서 병이 생기고 병에서 죽음이 온다

혀를 지나 목젖의 어두운 뒤, 속까지 보여주는 이 적나라한 비탄,

아, 속에서 매화가 피어나고

아, 속에서 백록담의 푸른 물은 산맥을 춤추며

아, 속에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가장 뜨거운 체온의 역사를 간직한 붉은 진달래가 연달아 피어나며

내부가 외부와 열리고

민들레 홑씨들도 아, 속에서 명멸하며 땅을 질주한다

아~ 속에는 끝이 없다

아~ 속에서 끝은 처음이 되고 다시 시작된다

5. 서울의 우울 4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없으면 자살로 본다,

법의 말씀이다

어느 자살도 깊이 들여다보면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너무 많다

심지어는 내가 죽인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밧줄을 목에 걸었다 할지라도

모든 죽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자살도 타살도

금환일식이다

6. 서울의 우울 5

오늘의 날씨,

모기가 힘이 없어요

우리는 일회용 건전지가 아니다

우리는 크리넥스 티슈가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 나무젓가락이 아니다

우리는 당일치기 풍선이 아니다

말할수록 야위어가는 메아리가 아니다

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왜 우리는 불안한가

밥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약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을 하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이 없어 놀고 있어도 불안하고

아침에도 불안하고

저녁에도 불안하고

죄라면 열심히 일한 죄밖엔……

유능해도 불안하고

무능해도 불안하고

낮에도 불안하고 밤에도 불안하고

왜 우리는 쥐새끼처럼 늘 불안한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골목마다 어린 소녀를 따라가는 성추행범이 많은가

성폭행 하고 손목까지 잘라 유리컵에 꽂아놓는 미친놈이 많은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손바닥 뒤집는 거짓말이 많으며

왜 손바닥 뒤집는 그 손바닥들로 하늘이 자욱한가

왜 나의 하늘을 누가 가리고 누가 뒤집는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법이 허전한가

정녕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7. 서울의 우울 9

- 앵무새 기르기

영혼 없는 새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새

고장난 녹음기보다 더 나쁜 새

내 영혼을 들킬까봐 남의 말 뒤로 숨는 새

세상은 그런 새를 기르기를 원한다

그런 새를 만들려고

학교를 만들었고 입시를 만들었고

사법고시를, 언론고시를 만들었다

앵무새를 길러놓으니 참 편해, 내 말을 다 해주잖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렇게……

참 고마워라,

숲에서 우는 소쩍새여, 꾀꼬리여, 부엉이여,

놀라워라

제 소리로 제 슬픔을 애통하며

예레미아 선지자처럼

세세년년

남의 슬픔을 관통하는 새

앵무새는 죽어도 못 따라갈

영혼 고운

8. 서울의 우울 15

- 서울 인, 포자 인

나는 지금 웃을 기분이 아니야,

이렇게 목줄을 매놓고

웃으라고 하면 당신의 입을 찢어놓을지도 몰라,

포자(胞子)들은 서울을 홀로 날아다닌다

다른 것과 합체하는 일 없이

단독으로 발아하여 새 개체가 된다,

받는 것 없이 웃기만 하라는

무리한 세상의 주문에 부대껴

목줄을 잡아당기는 서울을 떠나

난민이나 이재민이 되었나

지하의 난파선이 되었나

아무 데나 어두운 어느 구석에 기어들어가

양치류, 이끼류, 곰팡이균류가 된 포자들

쓰러져 번식하고 널브러져 병들고 병을 옮기는

넘치는 어둠의 농락

포자들은 어느 순간

페스트, 탄저, 살모넬라, 콜레라 같은 칼을 든 살인마가

되어 카메라 플래시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숨진 지 몇 달 후에나

고스란히 홀로 남은 고독사의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포자는 말하려는 듯하다,

미안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데드 마스크여,

외설에 가까운 희망이여,

너무 고독해서 고독의 품위를 지키지 못했구나

9. 서울의 우울 16

문을 열면 절벽이 나타났다

문을 열면 절벽이 나타났다

문을 열면 절벽이 나타났다

<제목: 열리지 않는 도시>, 무슨 영화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도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앞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 아래 괴기한 지평만 부우연 회색의 벌판에

무슨 기별처럼 낮달이 뜨고

나무에 걸린 하얀 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누군가 나무에 걸어놓은 소지천이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앞사람들이 모두 하얀 소지천이 되었다

나무들은 죽어 있었다

파란 하늘엔 양들의 침묵이 가득 흐르고

문을 닫고 나오려고 해도 문은 보이지 않았다

문이 불편듯 벽이 된 까닭이다

10. 모래 거울

대체 거울에게 무얼 물어보려는 거야?

그만둬,

세상의 모든 거울은 모래로 만들어져 있다네,

거울 안에 꽃이 피었다고

거울 안에 비누 거품 향기가 보름달의 말을 할 때도

거울의 말을 듣는 것이 음악처럼 아름다울 때라도

한 시간

두 시간

거울의 편지를 뜯지는 마

세상의 모든 거울은 모래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정치는 그 사회의 거울이다

시는 그 사회의 거울이다

꿈은 슬픔의 거울이다

왜 거울은 모래로 만들어졌을까?

보헤미안 유리 거울

모래밭에 이름을 묻고

떠나기, 환상이라는 거울이 깨져 흩어진 모래만 남은,

얼굴이 없는 신체만 남은, 시간이 사라져 시계만 남은……

흰 잠옷을 뒤집어쓴 채 강에 빠져 죽었다는 어느 화가의 어머니

흰 잠옷으로 가려진 얼굴

거울에서 손이 나와 자꾸만 모래를 눈에 뿌리네

모래 거울

영혼이 없는 대답이라네

11. 낙원역

이것은 영화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한

고통은 나의 고통이 아니다

핸들을 놓아버리면 죽겠지……

절망은 나의 신경이자 핏줄

절망은 자폭을 향해 간다

강변도로를 달리며 시나리오를 넘기듯이 생각한다

이것은 영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한

절망은 나의 절망이 아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

'묘지'로 갈아탄 다음 '낙원'역에서 내리세요……

어느 영화에서 들은 말이다

영화 제목은 잊어버렸는데 마치 그 주인공이 자기 같다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면

오늘이 오늘이 아니고

자기는 자기가 아니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요……

절망엔 비약이 있다

폐허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손에 흙을 쥐고 내일, 내일, 내일……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붉은 여왕, 흙의 딸

이것은 영화다……

생각하는 동안

해가 지고 해가 뜨고

흰건반이 검은건반이 되고 검은건반이 흰건반이 되고

집도 절도 없이

둘 사이는 멀어지고 멍하고 멍멍하고

고통은 타인의 고통

주인공은 늘 고난에 처하지만 사랑을 독려한다

죽음보다 고독이 더 무서워

시멘트 속에서 어린 시절의 꿈을 생각하네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도 죽지 않는다

총알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을 본다

이것은 영화다……

12. 달걀 속의 생 7

네? 저, 이번에도 삼송 냉장고 샀어요,

네? 냉장고…… 도어 타입은 양문형이고요

문 색깔은 루비에 하얀 펄이 반짝이는 것인데요,

아름다워요, 요즈음 냉장고 문은 모네의 캔버스 같아요,

문이 많다고 도망갈 길이 많은 건 아니죠,

피 묻은 캔버스에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것 같죠,

양쪽으로 여니까 편리해요,

내부도 깨끗하고 넓게 보이고요,

냉장고 속이 아니라 환한 무대 같다니까요,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불빛 밝은 곳>이라는 단편을 읽은 적이 있죠,

한 노인이 너무 외로워서 밤늦도록

깨끗하고 불빛이 밝은 카페를 찾는 이야기,

노인은 엊그제 밧줄로 목을 맸는데 조카딸이 풀어줬다죠,

젊은 웨이터는 노인이 귀찮아

당신은 지난주에 자살을 했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늙은 노인은 귀머거리라 알아듣지 못하죠,

뭘 드릴까요? 바텐더가 묻자

허무

하고 대답해요,

바텐더는 생각해요,

또 미친 사람이군……

허무가 두려워

깨끗하고 불빛이 밝은 곳을 찾는 사람들

"허무에 계신 우리들의 허무이시요, 그대 이름은 허무이시다"

밝고 깨끗한 곳으로 말하자면 냉장고만큼

밝고 깨끗한 곳은 없죠,

냉장고는 가급적 싱싱한 현재를 지향하죠,

허무가 두려운

세상의 여름과 야채는 냉장고 속으로 다 들어가죠,

삼송 냉장고 안에 당신 갈구의 모든 것이 들어가요,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를수록 냉장고는 점점 더 커가고

가난하고

가난하고

가난할수록 사람들은 더 깨끗하고 밝은 불빛에 의존적이 되죠,

썩어서 허무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요,

캄캄한 육체의 밤이 두려워서요,

민들레 한 단을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두었어요,

삼송 냉장고 안에 민들레가 가득 피고

하얀 민들레 씨앗은 만발하여 흩어져 어디로 갈 줄을 몰라

야채 칸 속에 하얀 곰팡이 홑씨로 맺혀 있어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신문지 아래서 민들레 한 단이 썩어 남긴 하얀 홑씨들이 조금씩 새나와

거실 바닥으로 밀려다녀요,

거실 바닥 발바닥에 밟히며

바보 민들레

아무리 발버둥 쳐도 냉장고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있죠

13. 희망이 외롭다 1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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