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흑백사진 흑백사진을 찍으려면 흑백필름을 넣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사진을 찍은 후에, 음, 이 사진은 컬러보다 흑백 쪽이 좋겠어, 하고 수정을 가하여 흑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름을 끼울 때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 끼운 필름을 중간에 교체하기는 어려우니 그때부터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풍경과 인물은 흑백이 된다. 가끔 이런 장면은 컬러로 찍어야만 그 맛이 사는데, 싶기도 하지만 과감하게 남은 필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은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드물게는 신선하고 독특한 사진이 나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는 그런 것이 많았다. 조금 참아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그래도 안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일들. 뭐든지 마음대로 생각되로 되는 세상은 멋지지만 그러다가 그렇게 안 되는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쉽게 화내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이 부당하다고 여기며 원망할 대상을 찾게 된다. 세상의 일이란, 사람의 일이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거나 점점 그것을 잊어가고 있는 세대, 마음은 조급하고 인내심은 섣불리 무너진다. 2. 천 년 동안 한 천 년 버틸 집을 지으려면 한 천 년 사는 나무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은 천 년을 살지 못해도 집은 천 년을 살아야 한다며, 목수들은 천 년 살 나무로 천 년 살 집을 짓는다고 한다. 천 년 살 나무를 자를 때는 나무의 휘어짐을 따른다고 한다. 휘어짐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자르면 나무는 천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고 한다. 누군가를 천 년 동안 사랑하려면 그의 휘어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그 사랑 안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그의 굴곡을, 그의 비뚤어짐을, 그의 편협함을, 그의 사소한 상처와 분노와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휘어졌는가. 나의 휘어짐을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의 휘어짐은 서로를 내치는가, 아니면 받쳐주는가. 우리는 사랑을 지을 수 있는가. 천 년 동안 지속될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당신과 나는. 3. 만나기 전에 가끔, 만나기 전부터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싶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더욱 좋아하게 되거나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편한 사이가 된다거나 마음을 열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만나기 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건, 세상을 보는 눈이 어딘지 나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막상 만나보면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지만, 같은 생각도 하고 다른 생각도 하지만, 어쩐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났다는 생각이 든다. 질문이 많아지는 건, 뿌리에서 떠나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온 건지, 그 안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내 속의 선명하지 않은 대답들의 정체가, 혹시 그가 걸어온 길 안에는 있었던 건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4. 말랑말랑 지난봄에 내 마음은 찰랑찰랑했고 여름에는 녹신녹신했다. 가을을 통과하여 그 마음은 말랑말랑해졌다. 볕에 잘 말린 홍시처럼, 추워졌다. 삶이 추워지고 마음이 추워지고 눈물이 추워졌다. 그래서 마음은 굳어져갔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덜 말랑말랑하고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을 가만히 만져본다. 어쩌면 다행인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착각이라면? 마음은 단단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얼어붙어가고 있는 거라면? 그리하여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누군가 가볍게 툭 하고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금이 생겨버린다면? 그 속에 들어 있던 채 익지 않은 마음들이 갑자기 무너지고 터지고 솟아오른다면? 그런 일 없기를,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부디. 69.고장 오래된 것들은 다 고장이 나는 거야.물건도 사람도,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오래된 것들은 쉽게 고쳐지지도 않는다.이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는 식이다.물건이야 부품을 바꾸거나 교체하면 되지만 사람은 어떻게 하나.마음은 어떻게 하나. 조금 두터워지고 조금 무뎌지기로 한다.모든 말들을 일일이 다 마음에 담아두었다가는 수리가 불가능한 고장이 날 테니까.너무 애쓰지 않기로 한다.스물네 시간 마음을 가동시키다 보면 언젠가 바닥이 날 테니까.
77.그러니까 대체로 그러니까 대체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시간이다.다시 말해 시간은 대체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한다.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기다리던 순간이 오고 기다리던 사람이 오고 기다리던 무엇이 온다.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상처는 흐려지고 마음은 아물고 아픈 기억은 지워진다.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용서할 수 없었던 무엇을 용서하게도 되고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참을 수 없었던 무엇을 참게도 되고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게도 되고 무엇보다 대체로 사랑을 다시 믿을 수도 있게 된다.그러니까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위한 좋은 일 하나가 예쁜 상자 안에 담겨 배송일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당신을 위한 작은 선물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져 어느 가게 쇼윈도에 가만히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내가 발견하기를.내가 당신을 떠올리고 걸음을 멈추기를.시간은 종종 나쁜 것들도 가져오지만 그러나 대체로 좋은 것들을 꽁꽁 숨겨둔 채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86.무수한 반복 바로크 음악의 특징 중에 지속저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말 그대로 저음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캐논이나 샤콘느,파사칼리아 등에서 사용되는 이 지속저음은 하나의 악기가 같은 패턴을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는 것이다.다른 악기들은 이것을 베이스로 하여 끝없는 변주를 해나간다.보통 하프시코드와 콘트라베이스가 비버의 미스터리 소나타 파사칼리아G단조에서는G, F, E, Db음이 처음부터 끝까지65번 반복된다.그런데 이 곡은 바이올린 솔로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어서 바이올린 혼자 지속저음과 변주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야 한다.반복되는 음을 베이스에 깔아놓고 이 곡을 들으면,무수한 반복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음의 변주들이 파생되는지 알 수 있다.베이스에 깔아놓는다는 건,이를테면 허밍으로 그 멜로디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귀로는 그 위에서 움직이는 변주를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이다.이런 방식으로 곡을 들으면 몇 초 간격으로 전율이 일어난다.이토록 무수한 반복.이처럼 무수한 반복.이렇게 무수한 반복.같은 생활이고 삶이다.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우리도 저 네 개의 음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일어난다.먹는다.일한다.잔다. 소유한다.사용한다.낡는다.버린다. 떠난다.머무른다.이별한다.돌아온다. 만난다.사랑한다.헤어진다.잊는다. 좋아한다.미워한다.후회한다.아무 상관없어 진다. 삶의 수많은 노래들.각 노래마다 반복되는 지속저음들.그 위에 우리는 새로운 변주를 시작한다.저음이 지속되는 한,변주도 지속된다.어떤 것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추하다.하나의 변주가 아람답다가 추해지기도 하고 즐겁다가 슬퍼지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쓸쓸하다.그리하여 설렌다.기쁘다.외롭다.쓸쓸하다로 하나의 노래는 끝나는 듯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저 모퉁이를 돌면 새로운 무엇인가가,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설렘을 다시 한 번 품게 되지만,실제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그러나 그리하여 결국은 마지막은 마이너로 끝나는 것이다.인간이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니까.나도 그리고 당신도.
95.언제 누구를 오늘 아침 라디오에 첼리스트 정명화가 나와서 그녀의 스승 피아티고르스키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입니다.만약 그 분을 조금 일찍 만났거나 조금 늦게 만났다면 그때만큼 많은 것을 배울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정명화가 피아티고르스키를 만난 건 그녀가 줄리아드를 졸업한 직후였다.음악적으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었던,더욱 깊고 큰 무엇에 목이 말라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다.피아티고르스키의 입장에서도 그녀와의 만남은 가장 좋은 시기에 이루어졌다.연주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가르치는 기쁨과 열정이 충만해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다.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이라는 말에 나는 열렬히 동의한다.또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와 나는 어떤 시기에 놓여 있는가,어떤 길을 가고 있는 중인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아무리 훌륭한 사람을 만났어도 나에게 배울 자세가 없고 능력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친구 사이는 물론이고 스승과 제자의 경우에도,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관계는 오래도록 지속되기 어려운 법이다.상대를 통해 자극받고 배우고 다른 것을 느끼고 함께 성장하는 관계.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한쪽이 이끌어줄 수 있겠지만 그 기간이 그리 오래 가진 못한다.인간이라는 건 가치를 좇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그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이미 만났고 앞으로도 만날 것이다.나는 그때 그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앞으로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와 동행하거나 그를 따라갈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오늘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다.좋은 방향으로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