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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 -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소담출판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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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 -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소담출판사]

팽이a 2019. 9. 10. 22:09

1. 문신


 
  문신을 새기는 사람이 말했다. 무엇이든 오래 지속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나에게는 오랜 시간을 바쳐 오래 간직하고 싶은 무엇이 없었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51p


  영원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면 문신 같은 건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그는 타이르듯 말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고, 영원을 감당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그는 위로하듯 말했다. 나는 일생을 영원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그때 들었다.             -52p


  가능하면 슬픔을 오래 지속시키는 것이, 그렇게 하여 긴 시간을 들여 싹을 틔우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문신을 얻는 방법이라고.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간 후 슬픔에 잠겨 있을 용기가 없다고, 나는 고백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어떤 아름다움은 그 슬픔을 지속시킬 용기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52p


  지속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영원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고 또 초월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았다. 왔다가 가는 봄이 영원이며 피었다 지는 것이 영원이며 그리하여 사랑이 영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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