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진은영 -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본문

하리 이야기/하리의 작은 책방

진은영 -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팽이a 2019. 9. 10. 22:10

1.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2. 어느 날




  바다는 에메랄드빛 커다란 눈물방울이었다가 모래 한 알 속에 전부 스며들었다. 나는 흰 양파를 썰며 웃었다. 불꽃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너는 마멀레이드를 씹었다. 차가운 야구공이 운동장을 굴러다녔다. 수평선의 새들은 소리 지르며 파란색으로 추락했다.


  흰 고래에게 한쪽 귀를 선물했다.
  너는 오늘도 마셔야 했다. 하늘의 물렁한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진흙 구름에 반쯤 묻힌 소라고둥,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야 했다.


  오렌지 만(灣) 위로 달콤한 태양이 떠올랐다. 해안선의 긴 혀를 따라 지붕의 자줏빛 이파리가 무성해졌다. 마음은 빗자루에 엉겨붙은 먼지덩어리였다. 호두 나무를 닮은 여자인지도 몰랐다. 팔을 펼쳤다. 커다란 호두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놀이터의 끊어진 그넷줄처럼 흔들렸다. 모든 게 빛나는 한 쌍이던 시대는 가버렸어 너는 외쳤다. 쇳소리 나는 오후 내내, 사라진 오후를 찾아다녔다. 햇빛은 9회말 마지막 공격의 야구장이었다. 어디에나 가득했다. 나는 만루의 투수처럼, 외롭지 않았다. 호두까기 병정의 부서진 턱뼈가 상점 진열장 밑 마른 바닥에서 바스락거렸다.









3. 비평가에게




  검은 기차, 길고 긴 기차가 있다
  너는기차를 탔다


  창문을 열고 너는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지?


  지나가는 고장의 이름을 여러 나라 알파벳으로 외우고
  웨일스식과 스코틀랜드식 발음 차이를 연구하지
  막 통과한 터널의 길이와 폭을 보고서에 기록한다


  나는 너의 사장인데, 너는 금일 휴업


  이제 내가 말해주지
  지나가는 고장의 긴 이름들에 타라, 그 이름은 촌충같이 길 수도 있고 칡처럼 향긋할 수도 있찌. 너의 얇은 바짓가랑이 사이를 휙 지나가는 그것을 느낄 것. 모르는 사이 어둠은 문어발처럼 숨 들어마시는 폐 속으로 뻗쳐온다. 빛의 국숫가락이 씹히지도 않은 채 넘어간다


  잠시 내려와 누워라 너는 좀 피곤할 거야
  어두워진 철길 옆으로 강아지풀들이 아무리 간지럽혀도
  Z Z Z


  밤새도록 다정하게 나는
  기차에 태워 갈 너를 만들어보려고…
  설핏 몸속에 떠다니던 음들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다 어둠의 꾸들꾸들한 반죽 위에









4. 혼자 아픈 날




말라가는 건초향기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오후야
너를 기다리며 이파리 사이에 달린
검은 버찌알들 전부 빛나게 닦아놓았어 방문 앞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별을
문을 활짝 열지는 마, 약봉지들이 멀리 날아가네
먹지 않고 숨겨둔 알약들은
길 잃은 아이들의 손바닥에
가본 길로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오누이들에게


          그럼 자작나무숲과 새들에게, 너에게만 말해줄게


내 몸엔 점이 여섯 개야 나는 오늘 과일칼을 깎았어
고통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자는 살인에는 관심이 없대
아무래도 미치광이 같아, 아름답게 찌르는 일에 중독된
그리고 나는
검정 속의
오렌지 같아 아무래도 점점 흐릿해지는


이 병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페스트는 익은 사과냄새 홍역은
맘 뽑은 깃털냄새가 난대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문득 깨어나고 싶다면?
          검지손가락 위의 꿀 세 방울과 성난 말벌의 벌통 사이에서
          화려한 접시 장식보다는 푸른 아스파라거스 밭의 초조함 사이에서


오늘 밤엔 어떤 병을 앓고 싶니? 어떤 詩를?


내 몸엔 점이 여섯 개뿐이야
달아난 한 개를 찾으러 밤의 손가락이 무한히 길어지고 있어
잘려나간 밑둥들이 송진냄새 뿜어내는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너를 기다릴게









5. 그림




도시 가운데로 난 길을 남자가 걸어갑니다
도시 변두리에서 한 여자가 수수께끼를 덮고 잠이 듭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여자가 거리를 뛰어다니는 동안
남자는 푸른 플라스크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가 지하도와 안개 가득한 거리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도서관의 유리 기둥 위에 누워 책을 읽었습니다
박노해와 네루다에 밑줄 긋는 여자
잠과 엘리엇을 암송하는 남자


그가 음악회에서 첼로를 멋지게 연주하는 동안
그녀는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뚱뚱거립니다 음악실 옆
작은 길은 숲으로 나 있습니다


          동쪽에서 달을 몰고 오는 여자
          그게 나의 이름입니다


          서쪽에서 해를 타고 오는 남자
          그게 당신의 이름입니다


더 높은 곳에 모든 걸 그리는 순간이 있어
오른쪽 그림과 왼쪽 그림을 잇습니다
다른 풍경은 검은 페인트로 간결하게 생략됩니다









6. 70년대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7. 나의 친구




별과 시간과 죽음의 무게를 다는 저울을
당신은 가르쳐주었다.
가나나한 이의 감자와 사과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그리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곤충의 오랜 역사와 자본의 시간
우리는 강철 나무 속을 갉아 스펀지동굴로 만드는 곤충의 종족이다.
어제 달에서 방금 떨어진 예언을 나는 만져보았다
먼 우주에서 떨어진 꿈에는 언제나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찌.


어둠 속에서는 어떤 보폭으로
야광오렌지 알갱이를 터뜨려야 하는지?
어떻게 기계와 자유가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지?
우리가 인간이라는 창문을 열고 그토록 높은 데서 뛰어내릴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대답의 끝없는 사막에
낯선 물음, 빛나는 피의 분수가 쉴 새 없이 솟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모든 걸 그리는 건
내 마음 가득한 지하수, 어쩌면 푸르고도 고요했던 강물이겠지만


너는 무심코 던져진 돌멩이,
강가에 이르도록 퍼지는 물음의 무한한 동심원을 만드는


너는 내 손에 쥐어질 얼마나 날카로운 칼인가!
높은 기념비, 예술가들, 철학자들, 위대한 정치가들보다도
나의 곁에서


어리석은 모세, 붉은 바다를 가르는 지팡이
확신의 갑옷을 두른 모든 시대의 병사들을
전부 익사시키는.


그것을 믿자, 강철 부스러기들이
우리를 황급히 쫓아오며 시간의 거대한 허공 속에서 흩어진다.
죽음과 삶의 자장(磁場) 사이에서.


그것을 믿자, 숱한 의심의 순간에도
내가 나의 곁에 선 너의 존재를 유일하게 확신하듯
친구, 이것이 나의 선물
새로 발명된 데카르트 철학의 제1 원리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