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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본문
1.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2. 피할 수 없는 길
이 길은 어제도 지나갔던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과만 마주칠 수 있다
수치심 때문에
그는 양쪽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덮어놓는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
말해질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다
수치심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과 얼굴을 바꿔놓는다
그러나 왜 말해질 수 없는 일은
말해야 하는 일과 무관한가, 왜
규칙은 사건화되지 않는가
이 길은 쉽게 기억된다
가로수들은 단 한 번 만에
나뭇잎을 떨구는 데 성공한다
수치심을 잊기 위해
그는 가끔 노래도 하고
박수도 친다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 없다
3. 착각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나는 불만 세력으로부터 서둘러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대들은 나의 영원한 동지로 남으리
우리가 설령 다른 색깔의 눈물을 흘린다 한들
굳게 깍지 꼈던 두 손이 침착하게 풀린다
좋은 징조일까?
그러나 기원을 애원으로 바꾸진 말자
붙잡고 싶은 바짓가랑이들일랑 모두 불태우자
깃발, 조국, 사창가, 유년의 골목길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
지나가던 여유가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있는
너 또한 하찮아지지 않겠니?
지금은 원근을 무시하고 지천으로 꽃 피는 봄날
그렇구나, 저 멀리 까마득한데
벚꽃은 눈 시리게 아름답구나
여유야, 나는 이제 지식을 버리고
뚜렷한 흥분과 우울을 취하련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저 꽃은 네가 벚꽃이라 믿었던 그 슬픈 꽃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나가던 여우는 지나가버렸다
여기서부터 진실까지는 아득히 멀다
그것이 발정기처럼 뚜렷해질 때까지 나는 가야한다
가난과 허기는 또 다른 일이고
4. 전락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존재가 비존재를 향해
무인 비행선이 하늘에서 지그재그로 추락하듯
느리게 굴러 떨어지고 있다
나는 감정에 충실했고
나쁜 습관은 버렸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어쩌면
키 크고 잘생긴 회계사가 될 수도 있었다
허나 어떤 악덕이 생을 여기까지 끌어내렸나
동요하는 눈동자와 망설이는 입술 때문인가
백 명의 친구와 열 명의 애인 때문인가
나는 모든 예감에 주의를 기울였고
폭설과 폭우는 되도록이면 피했고
언젠가는 좋든 나쁘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리라 믿었다
허나 빌어먹을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고
애수에 빠져 흑백영화를 보다
오오, 저 찬란한 핑크! 외쳐댈 뿐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전락했고
이 순간에도 한없이 전락하고 있다
길 잃은 고양이들이 털을 곧우세우고 쏘다니는
호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홍조로 해석되는
이 복잡하고 냉혹한 거리에서
5. 먼지 혹은 폐허
세상은 폐허의 가면을 쓰고 누워 있네. 그 아래는 폐허를 상상하는 심연. 심연에 가닿기 위해, 그대 기꺼이 심연이 되려 하는가. 허나, 명심하라. 그대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대를 상상한다네. 그대는 세상이 빚어낸 또 하나의 폐허, 또 하나의 가면, 지구적으로 보자면, 그대의 슬픔은 개인적 기후에 불과하다네. 그러니 심연을 닮으려는 불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심연의 주름과 울림과 빚깔을 닮은 가면의 가능성을 꿈꾸시게.
*
앉아서 돌아가신 아버지.
장롱 속에 숨어 우시는 엄마.
영엉 짖지 않는 개.
등뼈 모양으로 시든 나무.
한데 뒤섞어 손안에서 비비면 모래바람이 되는 것들.
까칠까칠한 헛것들.
고개 돌려 외면하니 그제야 매혹이 되는 것들.
*
기억의 한편을 꾹 눌면 흐릿한 풍경 하나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뽑혀 나오네. 나는 그것이 선명해질 때까지 온 육신을 흔들며 날뛰는 존재.
운명을 믿고
구원을 저주하고
굴욕 직후에 욕망하고
태양을 노려보며 달빛을 염원하고
상상의 무반주 랩소디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다가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완벽하게, 치명적으로, 넘어지는
거지.
*
이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평생 나는 누구이며 나의 삶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들은 내향적이고 감정적인 기질로 속으로 고민을 하다 결론을 내리면 평소와는 다르게 단호해져서 주변을 당황스럽게 한다. (MBTI 성격유형 분류에 따른 INFP, 소위 탐구가형에 대한 기술.)
*
오전의 정적과 오후의 바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불가역의 시간.
꽃이 성급히 피고 나무가 느리게 죽어가는 이유
뭐, 그렇고 그런, 그러나,
일순 장엄해지는
찰나의 무의미.
혹은
무의미의 찰나.
*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창조가 우주 내에서 면면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는 주제에 다시 한 번 돌아가려 한다. 나로서는 언제나 이 창조를 경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게 일어나는 일을 아무리 상세히 설명하려 해도 소용없다. 발생하는 결과와 비교해볼 때 나의 표현은 얼마나 빈약하고 추상적이고 도식적인가. 그 표현을 실현시켰을 때 이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무rien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녀가 어느 날 전화로 읽어준, 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의 일부.)
*
그리하여 연금술사는 평생토록 만든 황금들을 백일 안에 죄다 돌로 되돌려야 했네. 밥 먹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낮잠 잘 수 있는 단 하루의 평범한 하루를 신에게서 허락받기 위하여. 그 평범한 하루가 그에게는 평생 행한 기적들보다 더 기적적이었기에.
*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 완벽한 인간과 완벽한 경구 따위는 식후의 농담 한마디면 쉽사리 완성되었네. 나와 같은 범부에게도 사랑의 계시가 어느 날 임하여 시(詩)를 살게 하고 폐허를 꿈꾸게 하네.
(그대는 사랑을 수저처럼 입에 물고 살아가네. 시장하시거든, 어여, 나를 퍼먹으시게.)
한생의 사랑을 나와 머문 그대, 이제 가네.
가는 그대, 다만 내 입술의 은밀한 달싹임을,
그 입술 너머 엎드려 통곡하는 혀의 구구절절만을 기억해주게.
오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꽃은 성급히 피고 나무는 느리게 죽어가네.
천변만화의 계절이 잘게 쪼개져,
머무를 처소 하나 없이 우주 만역에 흩어지는 먼지의 나날이 될 때까지
나는 그대를 기억하리.
*
그리하여 첫번째 먼지가 억겁의 윤회를 거쳐 두번째 먼지로 태어나듯이, 먼지와 먼지 사이에 코끼리와 태산과 바다의 시절이 있다 한들, 소멸 앞에 두렵지 않고 불멸 앞에 당혹지 않은 생은 없으리니.
*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
6. 천 년 묵은 형이상학자
환상과 지식이 만나면 고통뿐이다
의자 위에서 심하게 훼손된 그의 인생을 보라
천 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별은 두 배로 늘었고 달은 지구와 합쳐졌다
견고한 아름다움을 갈고 닦던 시절은 끝났다
구원을 깔끔히 포장해주던 하얀 손들도 사라졌다
마음은 온통 물컹해지고 뒤죽박죽 섞여
쾌락과 예의와 명철함이 구별되지 않는다
천 년 동안 그는 의자 위에 의자의 의지로 앉아 있다
앞산에는 천 년을 참다 터진 웃음처럼 꽃들이 만발하다
오래전 그 등산길을 죽은 아내와 거닐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태운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이제
심장에는 나쁜 피조차 흐르지 않으니
우편배달부는 그를 낡은 인쇄물이라 했고
검시관은 잘린 신체의 일부라 했다
그는 자신이 의자의 유령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그의 몸은 의자로부터 분리되어
미분류 딱지가 붙은 상자로 옮겨져
영원한 어둠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상자 뚜껑이 닫히기 직전
영원하라, 형이상학이여, 의자에의 의지여!
그가 온 힘을 다해 절규해보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7. 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바람아, 너는 시대를 초월한 베이비 붐, 먼지의 절망으로부터, 태풍의 혁명까지, 가릴 것 없이 낳는, 너의 오만한 다산성 육체, 그 앞에서 숨 막히는 내 정신의 급체, 비등점까지 처참히 달아오르는 열등감, 사람은 바람의 지경을 꿈꾸고, 바람은 사람의 치욕을 가꾼다, 오거라 바람아, 아주 먼 데서 머리에 검은 띠를 묶고, 장거리주자처럼 달려오거라, 너 없이도 휘날리는 머리칼로, 너 없이도 펄럭이는 깃팔로, 너를 맞이하는 날, 생의 오랜 냉가슴은 뜨거운 평안을 안으리, 놀라워라, 광풍이 불어도 한 치의 오류 없이, 제 그림자를 정확히 찾아 앉는 낙엽, 낙엽, 낙엽, 저 야윈 나무들의 하찮은 기적, 기적, 기적, 불어라 바람아, 바람이 불어도, 사람은, 바람 속에서, 불멸을 숭배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사는 것이다,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8.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0.1*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자고가 끝이 불분명한 시간의 완곡한 안쪽에 웅크리고 누워 잠들고 싶은데, 지금 나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읹고 번민으로 오로지 번민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운명 앞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 하였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그 순간에 그대와 나는 또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목전에서 모래알처럼 산지사방 흩어지고 있는데
그대에게서 밤안개의 비린 향이 난다, 그대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 어둠 속 내륙의 습지를 돌아와 내 눈동자에 이르나 보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떠났는가, 떠나고 없는 그대여, 나는 다시 오랜 습관을 반복하듯 그대의 부재로 한층 깊어진 눈앞의 어둠을 응시한다, 순서대로라면, 흐느껴 울 차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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