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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L 베일리 - 데이트의 탄생, 자본주의적 연애제도 [앨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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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L 베일리 - 데이트의 탄생, 자본주의적 연애제도 [앨피]

팽이a 2019. 9. 16. 23:18

청년을 분리시키고 보호하게 되면서 연애 관습도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성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결정 부담에서 상당부분 벗어나면서, 이제 젋은이들에게 평생의 배우자를 구하는 일은 더 이상 시급한 과제가 아니게 되었다. 청년문화 내에서 연애의 강조점은, 이전 시대에 연애의 마지막 단계를 특징짓던 낭만적, 성적 탐험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데이트라는 사회적, 여가적 과정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35)
20세기 초, 데이트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연애가 생겨나서 옛날 방식의 연애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의 한계와 각종 기회로부터 처음 생겨난 데이트는, 1920년대 중반이 되자 방문 중심의 과거 연애 시스템을 완전히 대체했다. 이는 미국의 연애 시스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데이트는 연애를 공적 세계로 이동시켰다. 연애의 공간은 가정집 거실과 공동체 모임에서 레스토랑, 극장, 댄스 홀로 재배치되었다. 이 데이트 시스템의 등장으로, 이제 남녀 연인들은 사적 영역의 암시적 검열과 가족 및 지역사회의 눈초리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의 익명성을 얻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연애를 하게 되면서 연인들은 전에 없던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도시의 공적 세계에 진입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오락을 구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데에도 돈이 들었다. 데이트 시스템의 근간은 돈, 다시 말해 남자의 돈이었다. 연애가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돈을 중심으로 연애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데이트 시스템은 연애의 남녀 권력 균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44)
방문이 상류층 관습에 대한 반응이듯이, 데이트는 하층민들이 도시화, 산업화의 충격과 기회에 반응하며 형성된 관습이다. 중산층과 상류층은 엄격한 방문 예법을 통해 도시적 생활양식의 침범을 예방하고,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의 사회적, 지리적 이동이 초래한 일련의 사회 변화를 차단했다. 반면, 도시 생활이 가하는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도시가 제공하는 엄청난 기회들을 적절하게 통제할 경제력과 안전장치가 없던 하층민들은 새로운 환경이 주는 충격에 직접적으로 적응해야 했다. 보호받는 특권층의 시각에서 보면 자유와 가능성의 확대로 비쳐졌겠지만, 실상 데이트는 기회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 가족 전체가 비좁은 공간에 모여 사는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남의 집에 잠깐 들르는 일조차 쉽지 않은 사람들에게 방문은 그야말로 비실용적인 관습일 수밖에 없었다. 여성 노동자가 아무리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응접실이나 피아노는 언감생심이었다. (51)
많은 젊은이들은 냄새 나고 우중충하고 비좁은 가정 공간을 탈출하여 오락과 친밀감을 즐길 장소를 찾았다. 그러면서 즐거운 시간은 점차 공적 장소 또는 상업적 오락과 동일시되었고,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빠듯한 젊은 여성들은 남자가 제공하는 대접에 의존하게 되었다. (52)
데이트의 발생 배경에서는 도시의 부정적인 요인도 중요하지만, 도시가 제공하는 다양한 가능성들도 무시할 수 없다. 뉴욕의 밤 문화를 연구한 루이스 에렌버그에 의하면, 당시 상류층 젊은이들은 익명의 대중 속에서, 그리고 도시의 흥분과 자유 속에서 도리어 사적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말하자면 하층계급이 누리는 자유, 계급적 품위의 제한을 넘어서는 자유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53)
중산층 젊은 여성들은 대학에 가거나 직장을 구하거나 새로운 직업을 스스로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공적 세계에 진출했다. 공적 세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들은 점점 더 많은 사회 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도시의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의 수가 증가했다. 미혼 여성이 남자와 단 둘이 저녁을 같이 하거나 보호인 없이 극장에 출입하는 것은, 물론 이를 여전히 충격적으로 보는 시선이 없지 않았지만 20세기 초에 들어서면 더 이상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54)
데이트제도는 부모의 통제를 약화시키고 젊은 남녀에게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데이트제도를 기점으로 연애 권력이 여성에게서 남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단순한 방문 또는 정교한 19세기식 의례에서 방문이라는 제도의 주도권을 쥔 쪽은 여성이었다. 우선, 연애의 주된 장소는 여성의 집, 19세기로 따지자면 여성의 영역 혹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마련하고 주관한 연회 모임이었다. 그런데 데이트는 연애를 집 바깥의 세계, 남성의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제 영역을 벗어나자 여성은 연애의 주도권을 상당 부분 잃게 되었다. 과거 여성이 지켜야 할 예의 규범들은 규제적이고 억압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이 연애의 직접적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데이트의 영역 이동은 그와 같은 통제권을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56)
데이트하러 나가자는 초대는 남자의 세계에 들어오라는 초대이다. 데이트가 공적 영역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공적 영역이 주로 남자들의 세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데이트로 이루어지는 연애의 주 무대가 경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데이트제도의 핵심은 돈, 즉 남자의 경제력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데이트의 주인은 남자였고, 남자가 주인으로서 통제권을 행사했다. (58)
데이트에서 돈이 핵심이라는 점은 연애 관계에서 매우 중대한 함의를 가진다. 돈의 문제는 남자를 주인으로 만들고 연애의 통제권과 주도권을 남자에게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데이트를 경제적 비유를 통해서 가장 잘 이해되는 교환제도 또는 경제적 시스템 그 자체로 보게끔 만들었다. 아내가 가정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남편은 그 대가로 아내를 경제적으로 부양한다는 점에서 결혼도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해 가능하지만, 결혼은 영속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데이트와는 다르다. 데이트는 장기적인 구속과 책임의 관계를 내포하지 않으며, 상황적 측면이 강하다. 남자가 여봐란듯이 공공장소에서 여성에게 돈을 쓴다면, 이는 분명 경제적인 행위로 보일 것이다. (59)
데이트의 교환은 매춘의 교환에 비해 간접적이고 불명료한 편이다. 데이트의 경우, 남자가 모든 비용을 대야 한다. 여자는 돈을 낼 필요가 없고, 같이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남자도 똑같이 교제의 당사자이지만, 거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돈을 보태야 할 의무가 더해지므로 남자의 가치는 여자의 가치보다 훨씬 낮을 수 밖에 없다. 경제의 관점에서 볼 때, 여자는 말하자면 남자에게 교제를 파는 셈이다. 남자의 시각에서는 데이트가 교환이 아닌, 직접적 구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젊은 남성은 여자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돈이 있을 때 여자를 구매하고자 한다는 사실로 인해 데이트에서 여성의 도덕적 입지는 더욱 미묘해진다. (61)
남자가 데이트제도에서 실제로 구매하는 것은 이성교제의 즐거움도 아닌 바로 권력이다. 돈으로 의무를 사고 돈으로 불평등을 사고 돈으로 권력을 산다. 데이트 관습은 여성의 불평등을 코드화하고 남성의 권력을 승인했다. 남자는 모든 경우에 돈을 내지만, 여자는 그 대신 자신이 성적 호의의 빚을 지고 있음을 안다. 데이트 제도에서 통제권을 소유한 것은 남자이고,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이다. (62)
미국의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단지 이성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여지기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모든 데이트는 저녁을 먹거나 콜라를 마시러 외출하기, 영화 보러 가기, 기타 다양한 오락 구매 행위 등 소비 행위로 귀착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끝도 없는 소비가 아니다. 소비 행위는 주어진 범위 내에서 관습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남자는 으레 돈으로 여자의 환심을 산다는 것이다. (132)
가끔 더치 데이트 방식으로 데이트하는 남녀들도 이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다. 더치 데이트가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라면 여자가 남자한테 미리 돈을 줘서 남자가 돈을 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남에게 어떻게 비치는 가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청춘문화에서 데이트가 수행한 역할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33)
데이트의 공적 문화는 여자 못지않게 남자도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취급했다. 다만 데이트제도에서 남성의 상품화를 드러내는 언어가 상대적으로 덜 노골적이었을 뿐이다. 남성의 돈이 지닌 권력이 남성의 상품화 과정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성은 훨씬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남자가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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