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하리의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

최승자 -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시작] 본문

하리 이야기/하리의 작은 책방

최승자 -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시작]

팽이a 2019. 10. 13. 16:58




* 최승자 시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여전히 허한 느낌이 든다. 이 시집에서는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 그가 느끼는 감정을 엿볼 수 있다.





1. 하늘 도서관




오늘도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빌렸다
되도록 허름한 생각들을 걸치고 산다
허름한 생각들은 고독과 같다
고독을 빼앗기면
물을 빼앗긴 물고기처럼 된다

21세기에도 허공은 있다
바라볼 하늘이 있다

지극한 無로서의 虛를 위하여
虛無가 아니라 無虛를 위하여
허름한 생각들은 아주 훌륭한 옷이 된다

내일도 나는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빌리리라









2. 메마른 생각들만이




우주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생각들로 슬슬 젖어가는 게 인류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우주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우주는 생각들의 비[雨]로 가득 차 있다

한때 비 내렸었건만
이미 비 지나가고 또 오건만
비에 젖은 줄도 모르고
걷기만 하는 사람들

메마른 생각들만이
허허롭게 걸어다니는 이 거리









3. 20세기의 무덤 앞에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을 말한다
뒤에서 우리의 존재를 든든히 받쳐주는 그림자인 것마냥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환각제인 것마냥

20세기의 무덤 앞에
아직도 양귀비꽃 붉게 타오른다
잊어라 잊어라
잊지 않으면 되살아나리니
잊어라 잊어라 붉은 양귀비꽃,
더욱더 요염하게 피어나기 전에

잊어라 잊어라
죽음의 문명을

어느 날 구름 한 점씩
새로이 피어나는 날들을 위하여









4. 돌무덤 이야기





문명이 길게 하품하며 돌아누울 때에
미래파 학자들이 똑똑 노크한다

돌무덤 위에 돌무덤 쌓기였던 역사라도
그냥 그대로 놓아두라고,
그 위에 다른 돌무덤을 쌓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이라고
우리의 미래의 하루 하루라고.

(하늘에서 푸르른 기운이 쏟아져도
돌무덤 쌓기에 바쁜 우리들 맹목의 눈[眼])

(허공에 떠 있는 빈 山 하나
어제 그대로부터 온 그림 엽서)









5. 흘러가지 않는





이 세상, 흘러가지 않는 풍경
코스모스 한 잎 두 잎 흔들렸을 뿐
새 두어 마리 짹쨱거렸을 뿐
사위에 무슨 시원한 흔들림이 있었을까
역사에 무슨 후련한 물줄기들이 있었을까

슬픔도 없어 슬퍼진 이 세계
건너갈 다리도 없고 건너올 다리도 없는
흘러가지 않는 이 풍경, 이 세상
슬픔도 남아 있지 않아
남은 누룽지 슬픔까지 다 먹어버리고서
입 떡 벌리고 울고 있는 이 文明

(슬픔밖에 몰랐던 죄로
행복도 아름다운 음식이란 걸 몰랐던 죄로)









6. 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




세상이 펼쳐져 있는 한
삶은 늘 우울하다

인생은 병이라는 말도 이젠 그쳤고
인간은 언어라는 말도 이젠 그쳤고

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

저 혼자 깊어만 가는 이상한 江
人類

어느 누가 못 잊을 꿈을
무심코 중얼거리는가
푸른 하늘
흰 구름 한 점

(사람이 사람을 초월하면
자연이 된다)









7. 육체 공화국




우리는 다만 육체로서 살고 있을 뿐
육체의 위장과 육체의 눈을 달고 있을 뿐
육체는 먹자 하고
육체는 눕자 하고
육체는 쉬기만 하자 하고
아아 너무도 무거운 이 육체 공확ㄱ
어디론가 개종할 만한 마음[心] 공화국은 없을까
세월은 가자 해도
나는 안 가고
그래도 어디인가 개종할 만한 나라는 없을까
아니라고, 아니라고, 안 간다 해도
건망증 걸린 의식은 자주 딸꾹질을 한다
찔뚝 팔뚝 딸꾹질을 한다

의식이 가끔씩 뒷발굽질을 하며 가는
이 육체 공화국, 하아안없이 길다









8. 月下는 연민이다





月下는 연민이다
네 연민이 내 연민을 끌어안고 운다
연민이 깊어지면
숨 막히는 똥통이다
그 똥통으로부터 탈출하라고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뜬다
이 불쌍함을 보시라고 들이미는 것도
연민을 퍼붓는 것도 우리 자신
작용과 반작용이
깊은 똥통 더 깊게 만든다

그리하여 아이~ 아이~ 세월이 간다
목 졸라맨 세월이 아이~ 아이~ 잘도 간다









9. 비 맞는 한 무리의 낙타들이




어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오늘도 그치지 않고

비 맞는 한 무리의 낙타들이
젖은 산 하나를 끌고 나아가고 있다

빵이 넘치면 삶이 무의미해지고
그래서 빵 없는 집에 빵이나 갖다주자고

비 맞는 한 무리의 낙타들이
젖은 산 하나를 끌고 나아가고 있다









10. 누군가 어디선가





감각의 무덤이 나였었다
아니 무덤의 감각이 나였었다

언제나 배들은 호올로 떠다니고
먼 심해에서는 검은 비가 내리는데
누군가 어디선가 무덤의 벽을 훑는 소리
아직은 안 죽었다고 무덤의 벽을 훑는 소리

이것이 나인가, 이것이 나인가

나는 이것뿐인가
혹은 다른 어떤 것인가









11. 어디서 또 쓸쓸히




쓸쓸히 한 하늘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쓸쓸히 한 세계가
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또 쓸쓸히
꽃잎들은 피어나겠지요

바람은 여전히
불어가고 있겠지요

(전격적인 무궁한
해체를 위하여)

(오늘도 새 한 마리
허공을 쪼아 먹고 있군요)









12. 꿈에 꿈에




꿈에 꿈에
떠날 일이 있떠란다
갓신 고쳐 매고
떠날 일이 있떠란다

그리하여 오늘 오늘 오늘
내가 죽고
하얀 백지 위에서 노래하던
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가버리고

꿈에 꿈에
떠날 일이 있더란다
갓신 고쳐 매고
떠날 일이 있더란다




Comments